'피고인 박근혜'의 변호사들은 '선'을 넘었다
[류하경 변호사(salixshine@naver.com)]
영화 '의뢰인'에서 살인 혐의 피고인(장혁 분)이 변호사(하정우 분)에게 묻는다. "변호사님은 저 믿으세요?" 그러자 변호사가 말한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난 우리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 데에만 집중할 겁니다."
이런 태도를 두고 '변호사는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지만, 나의 답은 이렇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의뢰인을 인간적으로 믿고 안 믿고에 관심을 기울이면 일이 안 풀린다. 의뢰인에 대한 인간적 믿음이 확고하면 의뢰인의 거짓말을 걸러내기 어렵고 변호사가 사실관계를 믿고 싶은 대로 해석하게 된다. 반대로 의뢰인에 대한 인간적 믿음이 없으면 변호사는 무책임하게 일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성에 대한 독실(篤實)과 불신(不信)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으면 될까? 아니다. 아예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영화에서 변호사의 말은 적절하다. 변호사는 '믿고 안 믿고의 문제'에 집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만족할 만한 결과'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진다.
간혹 변호사 중에 의뢰인은 선(善)이고 정의이며 상대방은 악(惡)이거나 불의로 규정해 사건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경우도 많다. 후자를 확증편향의 오류라고 하기도 한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그 외의 것들은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오류를 말한다. 이 오류는 과정의 오류이므로 결과의 오류로 이어진다.
특히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 사건의 변호인들이 그래 보인다. 이는 부적절하고 의뢰인을 상당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변호사의 그런 태도는 실체적 진실과 부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탄핵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은 위에서 소개한 '안 좋은 사례'의 종합편이었다. 그의 대리인(변호인)들은 헌법재판관들에게는 '국회의 대리인'이라고 모욕하고, 검사에게는 '뇌물 받은 집단'이라고 공격했다. 재판 직후 법정 밖 복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서 "추론과 상상에 의한 장편의 소설"이라고 형사재판 자체를 무시했다. 어떤 변호사는 법정 안에서 태극기를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법원에서 정의를 찾을 수 없다며 변호사들이 전원 사임했다고 하니 '고객'으로서의 박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결론을 일단 목표로 두고, 근거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는 재판이라는 형식적인 역할극의 총론적 매뉴얼일 뿐이고, 사건에서 진심으로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면 변호사는 총론(목표)을 각론(입증 가능한 사실관계)에 따라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공정한 판사'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호사는 상대 변호사·검사와 싸우는 사람이 아니고 판사를 설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판사는 '무지의 베일'(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스 John Rawls가 <정의론>에서 가정한 개념)에 가려진 상태로 양쪽의 말을 듣는다. 변호사는 '내가 판사라면 이 말을 믿어줄까?', '내가 판사라면 이 정도 증거로 의뢰인을 믿어줄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변호사가 의뢰인을 선(善)으로 대상화하고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감정 과잉에 휩싸이면 법정에서 떼쓰는 모양이 되거나, 패소 후 판사를 비난하는 초라한 행색이 되기 쉽다. 이는 숲속에서 눈을 가린 채 의뢰인 손만 잡고 출구를 찾는 모습과 같다. 의뢰인에게 공감은 하되, 감정이입해 소진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무척 어렵다.
변호사 1년차 때 폭행사건 피고인을 변호했다. 의뢰인의 주장에 따라 폭행 사실 자체를 부인했지만 검사가 목격자 증인신문을 진행해 폭행 사실이 효과적으로 입증됐다. 유죄 선고 후 사무실로 돌아와 기록을 다시 보니 피해자 진술은 구체적이었고 피해자 몸에 난 상처도 진술에 부합했다. 사건 초기 의뢰인의 말만 듣고 피해자 진술서를 거짓으로 치부했음을 깨달았다.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폭행 사실에 대해 의뢰인을 조금 더 추궁했으면 어땠을까. 피해자가 먼저 시비를 걸고 욕설을 한 정황을 판사에게 설명하면서 범죄의 동기를 참작사유로 호소한 후에, 의뢰인이 법정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형량을 낮출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깊게 남았다. 위 사건에서 유죄의 집행유예 판결을 선고받고 법정에서 나온 의뢰인과 지인이 하는 대화를 옆에서 들었다.
"응. 나 나쁜 사람 아니야."
"근데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어?"
"그거 나쁜 짓 아니야."
"야, 이거 정말 나쁜 놈이네."
"..."
아차 싶었다. 그 지인의 질문 "근데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어?" 이 하나를 나는 하지 못했다. 이 하나의 질문이, 내가 의뢰인과 수없이 나눈 어떤 대화보다도 훌륭했다.
다만 "야, 이거 정말 나쁜 놈이네"라는 위 지인의 결론과 나는 견해를 달리한다. 나쁜 사람이 아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구조와 상황에 따라 선하거나 악한 면이 농도를 달리한 채 섞여서 표출될 뿐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마저 속이는 능력도 있다. 그래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의뢰인을 대하는 유일한 자세다. 의뢰인을 위해서.
[류하경 변호사(salixshin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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