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학원과 은행만 잘사는 나라
학원비·집값 부담에 결혼 출산 포기
교육개혁 주거안정 돼야 미래 희망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회사원 A(49)씨는 매달 월급 400만 원을 학원과 은행에 절반씩 갖다 바친다. 먼저 중고생 자녀 두 명의 학원비로 200만 원이 나간다. 수학과 영어는 주 2회, 국어는 1회 보내는데 이 정도다. 특강이 많은 중간·기말고사나 방학 땐 부담이 더 커진다. 나머지 200만 원은 전세대출 원리금을 내는 데 쓰인다. 대치동 학원가와 가능한 가까운 곳으로 이사한 탓에 고금리 부담을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다. 결국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쥐는 건 한 푼 없다. 필수 생활비는 마이너스통장 대출로 당겨 쓰는 중이다.
A씨가 유별나 그런 게 아니다. 대한민국 공교육이 붕괴된 걸 모르는 건 나랏일 하시는 분들뿐이다. 학교는 잠자는 곳이 된 지 오래다. 친구들 모두 학원에 다닌다는 얘기를 들으면 안 보낼 수 없다. 더구나 일타 강사 학원 등록 후 성적이 오르면 달러 빚을 내서라도 더 보내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초중고 사교육비는 26조 원도 넘었다.
그런데 A씨가 교육을 위해 쓰는 돈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세금도 꼬박꼬박 낸다. 성실 납세자라기보다는 월급에서 원천 징수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납부된 세금 중 상당 부분이 교육에 쓰이고 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실제로 내년 교육 예산은 90조 원이나 된다. A씨는 도대체 그 많은 교육 예산이 어디에 쓰이길래 자신이 또 생돈 200만 원을 매월 학원에 바쳐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게 국가와 개인이 이중으로 많은 돈을 들여 아이들을 키워내는데도 대학에선 학생들이 뭘 배우고 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기업은 더 심각하다.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고 토로한다. 도대체 대학 졸업까지 16년간 우린 뭘 한 걸까. 국가적으로 보면 삼중, 사중으로 낭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 관여하고 있는 모든 이가 불만이고 불행하다. 학생들은 입시 지옥과 무한 경쟁에 시달리고, 선생님은 추락한 교권에 실의에 빠졌다.
학부모가 아니어도 월급 절반을 은행 대출 원리금 갚는 데 쓰는 이가 적잖다.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40%를 넘은 차주는 모두 624만 명으로, 전체 빚 있는 가구의 32%에 달했다. 은행은 덕분에 먹고사는 정도가 아니라 배가 터질 지경이다. 전체 은행권 상반기 이자 이익만 30조 원이다. 은행마다 분기당 순이익도 1조 원을 훌쩍 넘어서며 사상 최대 실적이다. 혁신의 결과라기보단 임계치도 넘은 가계부채와 손쉬운 예대금리차 때문이다. 은행 평균 연봉은 1억 원을 넘긴 지 오래고, 퇴직금 잔치엔 입이 벌어진다. 2018년 이후 은행권 희망 퇴직자 1인당 평균 퇴직금은 5억5,000만 원이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 미친 집값의 최대 수혜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은행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중산층 월급을 몽땅 가져가는 학원비와 주거비 도둑은 젊은 층의 결혼과 출산까지 막고 있다. 새도 둥지가 있어야 새끼를 낳을 수 있는 법이다. 미친 집값을 감당할 수 없는데 결혼부터 밀어붙일 순 없다. 사교육비가 너무 커 2세를 제대로 키울 자신도 없는데 아이를 낳는 건 무책임할 수도 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저출산은 당연하다.
8월에 태어난 아기가 1만8,964명으로 집계됐다. 월간 출생아가 1만9,000명 선까지 붕괴된 건 통계 집계 이후 처음이다. 감소폭도 2년 9개월 만에 최대다. 우리나라 총인구는 매달 1만여 명씩 줄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가장 빨리 소멸하는 국가가 될 것이란 경고가 현실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출산 수당이나 양육비를 더 주는 식으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근원적 대책은 교육 개혁과 주거 안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학원과 은행만 번성하는 나라의 미래는 없다.
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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