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시각] 진정한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AI 덕에 '그럴싸' 포장 쉬워져
진짜 경험·지식 더 중요해졌다
방송 출연차 모 방송국에 갔다가 한 번은 안경을 부숴 먹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스스로의 바보 같음을 탓했는데, 또다시 갔을 때는 발등이 찍혀 피멍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꼭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방송국에 처음 가거나 자주 가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런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이마에 혹이 나거나 코뼈가 부러지고 가슴팍에 멍이 들 수도 있는 곳이었다.
방송국이 극기 훈련을 하는 곳도 아니고 그것이 말이 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 방송국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와 비슷한 봉변을 당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범인은 바로 화장실, 정확히 말해 그곳의 화장실 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무심코 화장실 문을 당겼다가 문에 얼굴을 가격당했고 안경이 부러졌다. 두 번째에도 몇 주 만에 갔다가 역시 화장실 문을 당겼는데, 발등이 찍혀 피멍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 가서 하면 다들 헛웃음을 내지만 나는 곧 그게 필연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곳의 화장실 문 손잡이 위치가 문제였다. 보통 손잡이는 문 끝에 달려 있다. 그래서 손잡이를 잡고 당기면 자연스럽게 내 몸은 문의 왼쪽이나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손잡이가 문의 거의 중앙 쪽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보자.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내 얼굴은 내가 당긴 문에 맞아버리고 말 것이다. 그 방송국 화장실의 문 손잡이는 보통의 손잡이보다 다소 중앙에 가깝게 달려 있었다. 그래서 무심코 손잡이를 당겼다가 내가 당긴 문에 맞아버리고만 것이다.
물론 늘 촬영 시간에 맞춰 정신없이 방송국을 드나드느라 내가 경솔했던 면도 있다. 그러나 이 손잡이는 마치 저격수처럼 매우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완전히 바깥도 아니고 완전히 중간도 아니어서 마치 그대로 당기면 내가 문을 피해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최고의 함정 같은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화장실 문이 어찌나 무거운지 힘껏 당기지 않으면 열 수 없었다. 그렇게 화장실 문에 두 번이나 맞아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 뒤로 그곳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 아무리 알고 있어도 여전히 그 문은 위협적이다. 당길 때마다 몸을 한껏 뒤로 빼고 내게로 비수같이 날아오는 문을 피해 잽싸게 빠져나가야 한다. 언뜻 보기에는 무척 세련된 색감과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문이지만 실용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는 거의 흉기에 가까운 문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뒤 문의 손잡이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무척 사소하고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인체와 행동 패턴에 맞는 정교한 배려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진정한 '전문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아마 그 문을 디자인한 사람은 겉을 아름답게 만들려다가 진짜 중요한 손잡이의 역할과 그에 대한 문제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진정으로 '문' 전문가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예술적인 감각만 뛰어난 디자이너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진정한 전문가였다면 실제로 문과 손잡이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까지 고려하여 '진짜 문'을 만들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소위 '사짜'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너도나도 전문가임을 내세우며 마케팅과 포장만 그럴싸하게 하는 경우가 무척 흔해졌다.
심지어 각종 글을 써주거나 그림을 그려주는 인공지능(AI)까지 등장하여 무엇이든 '그럴싸하게' 보이게 만드는 건 누구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는 진짜 사람을 생각하고 진짜 경험을 아는 진정한 전문가를 찾아내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해졌다. '석(石)'이 가득한 시대, 결국 옥석(玉石)을 가려내지 못하면 화장실에 갈 때마다 문에 얻어맞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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