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책과 지성] "사랑은 어떤 것도 어떤 문장도 만들 수 있어요" 1920년대 美 흑인 문학 이끈 할렘의 셰익스피어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10. 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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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턴 휴스 (1902~1967)

인종차별이 엄존하던 1920년 어느 날. 감수성 예민한 열여덟 살짜리 흑인 소년 랭스턴 휴스는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미시시피강을 건너다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 봉투에 시를 끄적거린다. 이 시가 바로 미국 흑인문학 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검둥이, 강에 대해 말하다(The Negro Speaks of Rivers)'이다.

"나는 강을 알고 있다 /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 왔다 / 인류의 여명기 유프라테스강에서 목욕했으며 / 콩고 강가 오두막에서 물 소리 자장가 삼았고 / 나일강을 바라보며 피라미드를 세웠다 /링컨이 뉴올리언스에 왔을 때 / 미시시피강의 뱃노래를 들었고 / 나는 흙탕물이 일몰속에 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 나는 강을 안다 저 태곳적부터, 어렴풋한 강을… /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 왔다."

흑인 소년이 한가롭게 뱃전에 기대어 시를 쓰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절, 휴스는 아프리카적이면서 동시에 우주적인 대작을 탄생시켰다. 소년은 세상의 모든 위대한 강이 그랬듯 흑인들의 문화도 인내 속에서 깊어진다고 믿었다. 그로부터 90년쯤 지나 미국에는 최초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고 취임식장에서는 흑인 시인의 축사가 울려퍼진다. 엘리자베스 알렉산더의 축시 '그날을 위한 찬가(Praise song for the day)'는 의미심장했다.

"분명히 말해요. 이날을 위해 무수한 이들이 죽었다고 /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준 이들을 위해 노래해요 / 철로를 놓았고, 다리를 잇고, 상추와 목화를 따던, 벽돌 하나하나를 놓아 눈부신 대저택을 만들고 그 안을 닦고 청소하던 이들을 위해 / 만약 가장 위대한 단어가 사랑이라면 / 사랑은 넓은 빛을 호수에 드리웁니다 / 사랑은 오늘, 이 겨울날의 예리한 섬광 속에서도 /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있고 / 어떤 문장도 시작할 수 있어요. (중략)"

설움과 한탄으로 시작한 흑인문학이 이제 미국 주류문학의 당당한 일원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흑인 소설의 백미라는 앨릭스 헤일리의 '뿌리'는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퓰리처상과 전미 도서상을 받았다. 앨리스 워커가 1982년 출간한 소설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도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1993년 토니 모리슨이 '재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흑인문학은 "백인문학보다 오히려 미국의 내밀한 부분을 더욱 정확하게 파헤친다"는 평가를 받으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노동과 핍박에 지친 신음으로 시작한 흑인의 이야기가 문학 중심으로 우뚝 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일을 문학은 해냈다. 우리가 읽고 쓰는 힘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다.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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