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자는 안돼!”…소신파가 사라지는 이유[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올해 5월 태국 총선에서 피타 림짜른랏 대표(43)가 이끄는 전진당은 왕실 모독죄·징병제 폐지 등 파격 공약을 내세워 하원 500석 가운데 151석을 얻으며 1당이 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여론의 심장부인 수도 방콕에서는 33개 의석 중 32개를 싹쓸이했습니다. ‘하버드 출신의 40대 엘리트 개혁 기수’인 그가 젊은 층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킨 덕분이었습니다.
입헌군주제 하에서 의원내각제를 실시하는 태국은 의회에서 총리를 뽑습니다. 하지만 상원의원 250명 모두를 군부가 지명하는 기형적 정치 시스템 상 전진당은 상·하원을 합쳐 과반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태국 정계에서는 피타 대표가 군부 정당의 지원을 받기 위해 ‘왕실모독죄 폐지’ 같은 개혁적인 공약을 포기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피타 대표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그는 개혁 속도를 조절할 용의가 있지만 왕실모독죄개정은 물러서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태국은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과 함께 (이미)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피타 대표는 친(親)군부 세력의 반대로 총리 선거에서 2번 연속 실패했습니다. 총리가 되지 못했지만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그는 “내가 정치를 하는 이유가 뭘까. 총리가 되려고? 아니다. 내 최종 목표는 태국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고, 총리가 되는 것은 그것을 위한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권력은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대신할 야당 대표가 필요하다”며 전진당 대표직에서도 미련 없이 물러났습니다. 태국 정치를 뒤흔들었던 40대 정치인의 광폭 행보는 이렇게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갔습니다.
● 당 주류인 친문·친명을 비판한 김해영
K정치에서도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노선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21대 총선을 한 달 반가량 남긴 2020년 2월 더불어민주당이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과 마찬가지로 비례 위성정당을 만든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민주당 김해영 의원(46)은 이날 최고위원회에서 긴급 발언을 신청했습니다.
“민주당의 비례 위성정당 창당 이야기가 일각에서 나온다. 민주당은 선거제도 개혁을 추진했고 그간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런 행보를 한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드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위성정당 창당에 분명히 반대한다.”
그의 발언 직후 민주당은 비례 위성정당 창당 계획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결국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창당을 공식화합니다. 그는 다시 한번 공개 발언을 신청해 반대에 나섭니다.
“명분은 없고 실익은 의심스럽다. 원칙에 따라서 국민을 믿고 당당하게 가야 한다. 상황이 어려울 때 원칙을 지키면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입지는 않지만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가 잘 안되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다.”
그는 윤석열 검찰총장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향해서도 “국민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발언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때 민주당과 추 전 장관이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면 무리한 검수완박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윤석열 정부의 탄생이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21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김 전 의원은 지난해 10월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는 등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커지자 “그만하면 됐다”며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이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습니다.
이준석 전 대표를 비롯한 여당 관계자들은 ‘김 전 의원 같은 개혁적인 성향의 인물이 있으면 국민의힘이 힘들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친문 세력에 이어 이 대표의 역린까지 건드린 그가 민주당에서 다시 중용될 확률은 매우 낮아 보입니다.
● 직설했던 윤희숙…사라진 尹의 총애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 출신인 국민의힘 윤희숙 전 의원(53)은 2020년 7월 국회 본회의에서 문재인 정부의 ‘임대차 3법’ 강행 처리를 비판하는 5분 발언에 나섰습니다. 그는 “나는 임차인입니다”라고 시작한 연설로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며 대선 패배 이후 무기력이 감돌던 보수 정당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윤 의원은 새벽 6시 반에 보좌진보다 먼저 국회에 출근해 일을 시작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의정 활동 1년여만에 부친의 농지법 위반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그의 선택은 다른 정치인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그는 부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전격 사퇴했습니다. 부친의 토지를 매각하고 그 이익금은 전액 복지재단에 기부했습니다.
이후 윤 전 의원은 자기 진영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 강연에서는 “어렵게 찾아온 정권을 성공시키기 위해 무슨 고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라면서 “여야가 별로 다르지 않게 사심 정치를 하고 있다”고 의원들 앞에서 따끔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에는 이런 윤 전 의원의 이런 태도를 좋아했습니다. 그와 여러 차례 따로 만나 경제 정책 과외를 받기도 했습니다. 선거대책위원회에 ‘내일이 기대되는 대한민국 위원회’를 별도로 만들어 윤 전 의원을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행사장에 직접 찾아가는 등 각별한 대우를 했습니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윤 대통령이 중용하는 참모들과 달리 고분고분한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윤 대통령의 역린에 가까운 ‘김건희 여사 일가’ 문제에 대해 사과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윤석열 정부 초기 내각 구성 때는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게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보수 정당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통이자 한 때 윤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윤 전 의원은 더 이상 쓰임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등 개혁이 필요할 때마다 당을 혁신할 인물로 세평만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역할이 줄어든 그는 라디오·유튜브 등을 통한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공수처·조국 광풍에 맞섰던 금태섭
“조국 후보자의 지금까지 해온 말과 실제 살아온 삶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 (젊은 세대가) 충격을 받았다. 후보자가 진심으로 변명 없이 젊은 세대에게 사과해야 한다.”
금태섭 전 의원(56)은 민주당 소속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 부정 등 비윤리적 행태를 꾸준히 비판했습니다. 조 전 장관이 자신의 서울대 박사과정 지도교수였지만 사적 인연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 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법 표결 때는 당론과 달리 기권표를 던졌습니다. 이로 인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사이에서는 ‘반역자’로 낙인찍혔습니다.
강성 친문 지지층의 표적이 된 그는 지지자들의 집단행동으로 21대 총선 서울 강서갑 지역구 당내 경선에 패배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향한 민주당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습니다. 민주당 윤리심판원은 20대 국회의원 임기를 이틀 남긴 금 의원을 공수처 표결 당론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징계했습니다.
국회의원의 양심에 따른 직무 수행을 막는 반헌법적인 조치라는 지적이 잇따랐지만 당 주류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총선 승리로 위세가 등등했던 이해찬 대표는 “강제 당론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 안팎의 많은 이들이 이때부터 민주당이 본격적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잃어버린 정당이 됐다고 회고합니다.
민주당을 쫓기듯 떠난 그는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의 권유로 윤석열 선거캠프에 전략기획실장으로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김 위원장이 물러나면서 그 역시 캠프를 떠나게 됩니다. 한때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 장관 후보군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국민의힘에서도 그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금 전 의원은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캠프 구조를 보니까 내가 기여할 수가 없었다”면서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는 오픈된 분위기가 안 돼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뜻을 펴지 못한 금 전 의원은 결국 ‘새로운 선택’이라는 제3지대 신당을 통한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 권력이 목적인 정치 vs 소명으로서의 정치
양극화가 심해진 K정치에서 자기 진영의 이념과 정책에 반대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소위 ‘개혁파’를 자청하면서 실상은 진영논리에 기대 막말과 인신공격을 일삼는 이들은 소신파를 변절자라고 욕합니다. 강성 지지자들은 일명 ‘개혁파’의 주장에 동조해 욕설과 위협을 가합니다. 결국 소신파는 내부 총질을 일삼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다음 선거에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진영논리에 갇힌 정치인은 자기가 속한 세력에 대한 조건 없는 충성과 복종을 요구합니다. 일상이 바쁜 유권자들도 사안마다 사실 관계를 따져 논쟁하기보다 자신과 유사한 성향의 사람 말을 따르는 ‘확증 편향’의 길을 걷곤 합니다. 그래서 정책을 유연하게 적용하고 사안마다 입장을 정하는 소신파 정치인들은 늘 고독합니다.
태국 전진당의 피타 대표는 지난달 22일 태국 의회에서 차기 총리가 선출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는 “시간이 나의 편이라고 믿는다. 정치는 마라톤이지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뛸 수 있는 체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태국의 민주주의는 선거일에 국한돼 있다. 투표가 끝나자마자 정치는 ‘카드 게임’이 되고, 정치인 다수는 국민의 신뢰를 배반할 준비가 돼 있다. 하지만 정치는 카드 게임이 아니라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한걸음 물러선 그는 이제 또다시 다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치에서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분명 일시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일관된 정치인의 태도가 유권자들의 뇌리에 각인돼 결실을 보기도 합니다. K정치에서도 거대 권력에 맞서면서 자신의 가치를 내세웠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21대 총선이 이제 6개월도 남지 않았습니다. 여야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로 일시적으로 외형적 통합을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각 당에서 소신파들의 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진영논리에 숨어 권력을 연장하는 쉽고 편한 정치를 대체할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다시금 주목 받는 시점은 언제일까요.
‘한국 정치의 수준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진 의문에 대해 해외 정치와 비교하면서 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empty@donga.com으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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