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트우드의 기발한 유머로 풀어낸 ‘여성’[북리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차은정 옮김│민음사
마녀로 몰려 사망한 女수학자
여성의 몸으로 살게된 달팽이
가지각색 여성들의 모습 담은
페미니스트 작가의 단편모음
사별한 파트너와 관계도 투영
특유의 유쾌함·재치 배어있어
서걱서걱. 반들거리는 점액 위를 천천히 따라가며 상추 잎을 먹는 달팽이. 짙은 엽록소의 향과 상추에서 배어 나오는 신선한 즙을 즐기며 “온전한 환희의 순간”을 느낀다. 그런데 어디선가 느닷없이 나타난 한 사내가 그 순간을 깨고, 살충제를 뿌려댄다. 살충제의 힘에 달팽이의 영혼은 공중으로 던져지고, 한 여성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새 단편소설집 ‘숲속의 늙은 아이들’ 속에 수록된 단편 ‘윤회 또는 영혼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순간에 여성 인간이 돼버린 달팽이는 우적우적 고기를 먹어대는 남자친구에게 혐오를 느끼고 “애무도, 엉킴도, 애가 탈 정도의 관능적인 엮임과 뒤틀림도 없는 인간의 성(性)적 절차”의 “조악함”에 절규한다. 그리고 외친다. “내 작은 영혼이 이 흉측하고 거대한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세요!”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가 빛을 발한다.
책은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 ‘눈먼 암살자’ ‘그레이스’ 등으로 전 세계 독자들의 찬사를 얻은 애트우드의 단편 15편을 모았다. 평생을 페미니즘과 여성의 삶에 천착해 온 작가답게 작품들 속엔 달팽이의 영혼이 들어가게 된 젊은 여성부터 소녀, 중년 여성, 엄마와 딸 등 다양한 조건하에 놓인 여성들의 모습을 담았다.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에선 문어를 닮은 우주인이 별안간 지구에 나타나 지구인들에게, 남편에게 억압받던 쌍둥이 자매를 위해 그 남편을 칼로 베어버리는 내용의 우화를 설파하고, ‘조개껍데기사(死)’에선 마녀로 몰려 길거리에서 옷이 벗겨진 채 조개껍데기로 살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다 사망한, 이집트 출신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전한다. 엄마가 마녀가 아닌지 의심하는 소녀와 그 어머니의 이야기인 ‘나의 사악한 어머니’는 모녀 관계만이 가질 수 있는 진한 감동을 가장 세련되고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표현해내며, 실존 여성 작가인 애트우드 자신이 세상을 뜬 지 70년이 넘은 남성 작가 조지 오웰을 인터뷰하는 ‘망자 인터뷰’는 재치 넘치는 부분들로 독자를 폭소케 한다. 성병이 인류를 휩쓴 어느 미래, 출생을 관리하고 소년과 소녀의 “성적 회합”을 계획하는 “으뜸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아수라장’은 ‘시녀 이야기’의 스핀오프인 듯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지적이고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한 애트우드의 목소리가 한 작품 한 작품마다 깊이 배어 있다.
책은 세 부분으로 돼 있다. 이처럼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십분 발휘한 작품들이 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그 앞과 뒤로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애트우드와 작가 그레임 깁슨의 관계를 투영한 ‘티그와 넬’, 그리고 ‘넬과 티그’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넬과 티그 이야기는 노년이 된 둘과 티그, 즉 깁슨의 죽음 이후 상실에 관한 이야기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요소를 담은 채 인생의 황혼을 직조하고 삶을 가만히 성찰한다. 특히 ‘과부들’과 ‘나무 상자’ 등 깁슨이 생을 달리한 2019년 이후 쓰인 단편들에선 그를 향한 그리움과 상실이 짙게 묻어난다.
표제작인 ‘숲속의 늙은 아이들’은 이러한 그리움과 상실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애트우드다운 유쾌함을 품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네. 넬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마음이 무너져 내려.’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과자 좀 있어?’라고 말한다.”
여성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된 달팽이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생각한다. “나는 왜 고통받아야 하는가? 궁극적 수수께끼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 존재의 조건을 묻는 것.” 15편의 이야기를 통해 애트우드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작가에게 다시 한번 반하는 지점은, 여기서 동반되는 애트우드 특유의 유머와 재치일 터다. 애트우드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444쪽, 1만8000원.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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