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돼지나 잡아라"…박노식 시인 '길에서 만난 눈송이처럼' 출간

조영석 기자 2023. 10. 2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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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가 피워 낸 한 송이 들꽃의 모습"
박노식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길에서 만난 눈송이처럼’표지(문학들 제공)/뉴스1

(광주=뉴스1) 조영석 기자 = "시 청탁을 받고 '하루만 기다려 주라'라는 시인에게 연락처까지 차단했던 그녀가 문짝을 차고 찾아와 '시로 돼지나 잡아라. 시로 돼지나 잡아-'라고 악다구니를 던졌다"

시로 돼지를 잡을 수 있을까. 시가 돼지의 목에 걸릴수는 있지만 결코 돼지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시인도 알고, 그녀도 알고, 돼지도 안다.

시인은 그 말이 '불에 덴 볼처럼 끔찍했지만' 그래도 '이른 아침, 멍하니 까마귀 울음소리를 들으며'시를 쓴다.

"벼락 맞은 나무처럼 누어서/ 빗소리를 듣는다/ 귀가 예민해진 것/아직도 기다려야 할 사람이 있고/시를 오래 써야 하고, 그리고/똑똑하지 못하고/내세울 게 없기 때문인데/내가 나의 길에 들어서 설움을 배우는 동안/세상은 쓸쓸하고 사랑은 멀고/꺾인 꽃은 또 꺾이고/나의 노동은 감옥 같기만 하다"(시 '이름아침, 멍하니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다'일부)는 시인의 고백은 처연하다.

결이야 다르지만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정말 얼마큼 작으냐…"라고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노래했던 김수영 시인의 마른 얼굴이 겹친다.

박노식 시인이 네 번째 시집 '길에서 만난 눈송이처럼'을 '문학들 시인선'으로 펴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로 나눠 담은 그의 시 64편은 계절에 상관없이 "움켜쥔 손에서 상큼한 앵두 한 알이 살짝 빠져나간 느낌이 들고/그래서 뭐랄까/…/밤새 뒤척이고 앓아눕던 날에 치자꽃이 그새 지고 말 듯"(시 '치자꽃'중에서)시리고 아프다.

내밀한 자기고백의 시는 마치 그가 시를 쓰기 위해 살고 있는, 전남 화순군 한천(寒泉)면의 한천수처럼 맑고 시리다.

"애써 슬픔을 감추면/저리 붉어지는 거야/크게 아픈 거지/붉은 열매를 따서 깨물 때,/온몸이 서러워지는 것처럼/사랑은/수평선 위에 가지런히 놓일 수 없어/ 그러니까,/내가 먼저 울어서/저 각혈이 깔리면/넌 그냥 바라만 봐/울지는 말고/더는 울지는 말고"(시 '노을'전문)라고 위로하지만 대상은 네가 아닌 나일수 밖에 없다.

시인은 노을이 붉은 것은 슬픔을 감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 울음이 노을처럼, 각혈처럼 물 들면 그게 내 아픔이니 울지 말고 그냥 바라봐 달라고 한다. 네가 울면 내가 더 아픈 것이 사랑이다.

박 시인의 노래를 하나 더 들어보자. "이제 부를 이름도 없이 먼 항구에 와서 파도 소리를 듣는다//볼이 차다/착한 갈매기 울 때 멀리 동백꽃 하나 둘 지고/눈은 푸른 바다에 젖고//혼자라서 외롭지 않은 것처럼 더는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 눈빛도 없다//바다는 생각이 많아 파도마다 아픈 기억들을 흘려보낸다//얼굴이 부용화같이 창백한 영이는 오래전에 나를 떠났다"(시 '통영에 와서'전문)

하지만 시인에게 오래전 나를 떠난 '영이'는 끝이 아니라 늘 새로운 시작과 이어지는 접점이자 '별의 빛남'의 근원이 된다.

"밝은 별이든/흐린 별이든/사랑하지 않고서 저리 빛날 수 있을까?/별들이 사랑을 나누는 밤은/지상의 우리가 아프기 때문./미끄러져 가는 밤 속에서/나 홀로/별의 씨앗을 뿌린다"(시 '별의 씨앗'일부)며 아픔을 껴안는다.

그에게 시는 아픈 사랑이 세상과 화해하는 비밀이다. 때문에 사랑과 시를 쓰는 행위는 둘다 아프다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더 적확히는 시를 쓰는 행위가 사랑이기에 "새벽이든 아침이든 대낮이든 초저녁이든 한밤이든/시도 아닌 것을 붙들고 앓는다"(시 '시가 찾아오는 순간'일부)고 고백한다.

그래서 곽재구 시인은 시집 뒤 표지에 실은 '표사'에서 "그는 시인이다. 아침에 눈 뜨면 시를 쓴다, 꽃이 피면 시를 쓰고 바람이 불면 시를 쓴다. 길에서 만난 눈송이에게, 새털구름에게, 물 위에 뜬 산그늘에게 인간의 시를 들려주는 그의 모습은 따뜻하고 평화롭다. 우리의 서정시가 피워 낸 한 송이 들꽃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고 평했다.

그런가 하면 고재종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박노식에겐 시가 사랑이고 사랑이 곧 시다. 박노식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울렁거리고, 서럽고, 맹렬하고, 지독히 아픈 사랑의 고백이다. 그 한 편 한 편 사랑의 고백은 다시 시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 대상을 향한 마음에서 모든 시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노식의 사랑의 우울과 서러움은 이게 또한 지옥이 되기도 하는 걸 어떡하랴"고 진단했다.

박노식 시인은 광주에서 태어나 2015년 '유심' 신인상을 받았다. 시집 '고개 숙인 모든 것' '시인은 외톨이처럼' '음 밖의 풍경'을 펴냈다. 화순군 한천면 오지에서 시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kanjoy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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