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단장이자 응원단으로… 하루 3만보 걸으며 ‘팀 코리아’ 뒷받침”[M 인터뷰]

허종호 기자 2023. 10. 2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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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아시안게임 선수단 대표 최윤 OK금융그룹 회장
보여주기식 응원 하지 않으려고
경기 전엔 선수들 찾아가지 않아
대회 개막 전 격려금 전달하고
추석연휴땐 전원에 기프티콘 쏴
일본 나고야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
기업 일구며 한국 골프·유도 등 후원
룰지키며 최선, 스포츠·경영 비슷
최윤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수단 단장이 지난 18일 서울 중구 OK금융그룹 사무실에서 단복 등에 적힌 팀 코리아를 가리키며 활짝 웃고 있다. 문호남 기자

최윤(60) OK금융그룹 회장은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단장’으로 참여했다. 최 회장은 대회 기간 선수단 대표로 활동하며 선수들을 격려하고 애로사항을 청취,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지난 9월 23일 개회식 직후부턴 비공식 ‘응원단원’을 자처했다. 최 회장은 하루 6∼8개 경기장을 방문, 선수들을 향해 목청껏 응원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 3만 보 이상의 강행군. 열정적인 응원전은 16일간 이어졌다. 최 회장을 비롯해 국민의 응원에 힘입어 한국(금 42, 은 59, 동 89)은 종합순위 2위 일본(금 52, 은 67, 동 69)과 간격을 5년 전보다 좁힌 3위에 자리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당시 한국은 금메달 49개(은 58, 동 70)로 3위, 일본은 금메달 75개(은 56, 동 74)로 2위였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 자리한 OK금융그룹 사무실에서 만난 최 회장은 “적어도 하루 6개 경기장을 방문하려고 했고, 8곳까지 가보려고 했다”며 “우리나라 응원단은 물론 교민들도 대회 입장권을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래서 나라도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기 위해 이곳저곳 응원을 다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수들의 컨디션이 최우선이기에 경기 전엔 만나지 않았다. 보여주기식 응원이 싫었다. 경기 전에 얼굴을 보고 ‘파이팅’을 외쳐도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경기장에선 응원단으로, 선수촌에선 팀의 일원이자 선수단장으로 고충을 들으며 아시안게임에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항저우아시안게임은 16일간 진행됐지만 선수들은 대회를 위해 수년간 구슬땀을 흘렸다. 최 회장은 선수들의 공든 탑이 무거운 분위기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기 진작에 애를 썼다. 아시안게임 개막 전엔 진천선수촌을 방문해 대회에 출전하는 39개 종목 지도자들에게 1억4000만 원의 격려금을 전달했다. 통상 보너스는 성과에 따라 주어졌는데, 이례적으로 대회 시작 전에 지급돼 지도자들의 만족감이 컸다는 후문이다. 또 대회 기간 중이었던 민족 명절 추석엔 선수와 임원 1140명 전원에게 3만 원 상당의 기프티콘을 모바일로 선물했다.

최 회장은 “과거의 선수단장은 권위를 지키면서 무게중심을 잡던 직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수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경기력을 유지하도록 도와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현재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명절에 가족과 떨어져 외로울 수 있기에 작지만 선물을 줘서 힘을 내게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재일교포 3세다. 최 회장의 할아버지가 1920년대 일본 나고야(名古屋)로 건너갔다. 최 회장은 5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나고야에서 태어나 자랐다. 집안 형편은 가난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았다. 최 회장은 학창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최 회장은 “집안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기에 돈을 벌어서 생계에 보탤 필요는 없었다”면서 “다만 내가 쓸 돈은 나 스스로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버는 재미를 어린 시절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경제관념에 눈을 뜬 최 회장은 대학 땐 작은 회사를 설립·운영해 적지 않은 돈을 모았고, 나고야가쿠인(名古屋學院)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엔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제법 돈을 벌었으나 최 회장은 항상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래서 1999년 사업 영역을 일본에서 한국으로까지 확장했다. 그게 규모가 커지면서 스포츠계와 인연을 맺었고, 골프와 유도, 여자농구, 농아인 야구 등 다양한 종목을 후원했다. 지금은 남자 프로배구 OK금융그룹과 읏맨 럭비단의 구단주, 대한럭비협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교 때 럭비 선수로 활동한 터라 특히 럭비 종목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럭비는 2021년 열린 도쿄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최 회장은 “중학교 땐 축구, 고등학교 땐 럭비를 했는데, 방과 후에도 체육부 활동을 하는 게 당연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야구, 배구, 수영 등 배울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다. 운동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면서 “일본은 여전히 학교에서 많은 체육 활동을 한다. 국내에서도 교육부 주도로 학교체육을 제대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 회장은 스포츠와 기업 경영이 유사하다고 말한다. 규정과 법률 등 원칙을 준수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 회장은 “모든 스포츠엔 규정이 있고, 규정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경영 역시 법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스포츠 선수들처럼 기업인도 룰을 지켜야 한다”며 “한국에서 처음 사업을 했을 때 법보다 예외적인 관행에 대해 말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관행을 따르면 언젠가 그게 우리의 발목을 잡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로지 법과 시장을 보고 사업을 했고, 결국 그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제일 빠르고 가까우면서 안전한 길로 걸어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2021년 1월 대한럭비협회장에 당선됐고, 그해 7월 도쿄올림픽에선 선수단 부단장을 지냈다. 그리고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선 재외동포 출신으론 처음으로 선수단장을 맡았다. 최 회장은 “재외동포가 스포츠를 통해 조국을 접할 때 애국심과 자긍심을 갖게 된다. 나 또한 일본에서 그랬다”며 “재외동포가 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해외에 거주 중인 1000만 명의 우리 민족이 아시안게임을 통해서 애국심과 자부심을 고양할 수 있도록 대한체육회에서 내게 기회를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스포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강조한다. 사회의 기본이 되는 규정 준수, 그리고 경쟁자와 우정, 동료에 대한 신뢰를 꼽는다. 최 회장은 “스포츠 선수들은 죽자 살자 우승을 위해 다투지만 규정을 준수하면서 경기를 치르려고 노력한다”며 “그리고 경쟁자를 존중하고, 경기를 마치면 친구가 되기도 한다. 단순하고 쉬워 보이지만 실제 사회에선 보기 힘든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또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경험하고 이런 것을 배운다면 사회 내 갈등도 완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일본서 식당 성공후 국내 소비자금융 뛰어들어… 한국 국적 유지하며 자수성가

■ 최 회장은

“큰 돈 잃어봤지만 결국 만회”
작년 업계 첫 공시대상기업 돼

최윤 OK금융그룹 회장은 자수성가한 기업가다. 최 회장은 식당 창업으로 경영에 입문했고, 이젠 대기업 총수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은 최 회장은 대학 졸업 무렵엔 적지 않은 자금을 마련, 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최 회장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한국 국적을 유지했기에 일본 내 취업에 제한이 있었다. 최 회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일본에서 고생하셨다. 일본에 대한 한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며 “국적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건 운동선수, 연예인, 의사 등 전문직, 그리고 사업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인식의 전환과 고객의 요구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최 회장은 “어머니가 야키니쿠(한국식 고기구이) 가게를 하셨는데 작고 허름했다. 우리 동포들이 운영하던 야키니쿠 가게가 대부분 그랬고, 역시 동포였다”며 “일본인들 역시 야키니쿠 가게를 가고 싶어 했지만 허름한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서울 강남의 삼원가든을 모델로 깔끔한 야키니쿠 가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이 창업한 300석 규모의 식당 ‘신라관’은 예상대로 항상 일본인으로 가득했다. 가게는 금세 확장, 지점은 나고야 1곳에서 일본 전역 60곳으로 늘었다.

승승장구한 최 회장은 1999년 사업 영역을 한국으로 넓혔다. 최 회장은 “1999년 벤처캐피털에 투자하면서 한국에 넘어왔다. 주위에선 일본에서 성공한 사람도 한국에선 살아남기 힘들다며 말렸다. 롯데와 신한은행 등이 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실패했다”며 “나 역시 실패했다.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엄청 힘들었고 결국 큰돈을 잃었다. 그러나 일본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꼭 만회한다는 생각으로 노력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다시 한 번 인식의 전환과 고객의 요구 충족이라는 초심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소비자금융(대부)업이었다. 최 회장은 2002년 소비자금융업체 원캐싱을 설립한 뒤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업체를 인수, 성장시켰다. 최 회장은 “국내에서 가장 큰 업체가 매물로 나왔었다. 위기라고 하지만 재무제표 등은 워낙 좋았다”며 “그때부터 소비자금융업을 공부했는데, 서비스업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동안 소비자금융업이 갖고 있던 나쁜 인식과 두려움을 없앤다면 고객들이 쉽게 다가올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유명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는 등 친근감을 더하는 광고와 마케팅을 앞세워 회사를 꾸준히 키웠다. 그리고 소비자금융업 진출 20년 만인 지난해 5월 OK금융그룹은 저축은행·소비자금융업 최초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공시대상기업집단(자산총액 5조 원 이상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올해 환갑을 맞은 최 회장은 또 한 번의 성장을 꿈꾼다. OK금융그룹은 지난 19일 자회사의 금전대부업 라이선스를 반납, 종합금융그룹 도약을 추진하고 있다.

허종호 기자 sportshe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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