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 명 희생 ‘군사독재의 기억’ 이으려 나무 심어요”

김미향 2023. 10. 2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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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성스러운 나무’ 자카란다 심기 행사
76~83년 군사정부 희생자 추모하려
2021년부터 나무 3만그루 심기 운동
인권침해 대표 공간 ‘에스마 추모관’
지난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25일 서울 용산구 아르헨티나 대사관저에서 열린 ‘기억을 심자’ 식수행사에서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왼쪽)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와 이진경(오른쪽) 아르헨티나만영문화재단 이사가 자카란다 묘목을 심고 있다. 아르헨티나 대사관 제공.

“아르헨티나가 민주주의를 되찾은 지 40주년이 되는 올해, 여기 심는 자카란다 묘목이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는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나가면 좋겠습니다.”

25일 오후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30여명의 방문객이 서울 용산구 아르헨티나 대사관저 마당에 둥글게 원을 그리고 모였다.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는 직접 삽을 들고 인사말을 마친 뒤 양지바른 마당 한켠에 키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고 흙을 다졌다. 와이셀피츠 대사는 “자카란다 묘목은 남미 원주민이 신성시하는 나무이자 잎보다 먼저 보라색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나무”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자카란다가 활짝 피는 계절은 아르헨티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적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열린 ‘기억을 심자’ 식수행사는 2021년부터 3년째 계속되고 있다.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참모총장이 일으킨 쿠테타 발생 45년이 되던 2021년 아르헨티나 인권단체들은 군부독재정권 아래서 억류되고 실종된 3만여명의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나무 3만 그루를 심는 ‘기억을 심자’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아르헨티나 각 가정에서 작은 화분에 나무를 심어 당시의 고통을 기억하자는 시민 운동으로 발전했다.

쿠데타로 들어선 군부독재정권은 1983년 무너졌지만, 이들이 자행한 잔혹한 고문·납치·살해·성폭력 등을 일컫는 ‘더러운 전쟁’의 아픔은 아직 여전하다. 당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루이스 푸엔조 감독의 영화 ‘오피셜 스토리’(1985)에 잘 묘사돼 있다. 이날 행사에는 마르시아 도네르 아브레우 주한 브라질 대사와 조영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홍인화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관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25일 ‘기억을 심자’ 행사에서 에밀리아노 와이셀피츠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왼쪽에서 두번째)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대사관 제공.
25일 ‘기억을 심자’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 아르헨티나 대사관 제공

특히 이날 행사는 ‘에스마(ESMA) 추모관’이 지난 9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열렸다. 유네스코는 지난달 19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인류에게 뛰어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유적 목록에 에스마 박물관 및 기억의 터를 포함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아르헨티나는 1976년 쿠데타 이후 민주화 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주요 인사들을 납치해 전국 500여개의 비밀수용소에 가둬두고 고문과 살인을 자행했다. 특히 사관생도들의 군사훈련소 에스마에서 비밀수용소를 운영하며 납치·고문·살해를 일삼았다. 이곳에서만 약 5천명이 불법 납치돼 고문에 시달린 뒤 바다에 던져지거나 살해된 뒤 묻혔다고 전해진다.

특히 에스마 수용소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것이 임산부 살해와 영아 유기이다. 군부독재정권은 임산부 수십명을 납치해 에스마 비밀수용소에서 출산하게 한 후 아이들을 살해하거나 친정부 인사의 가족에 불법 입양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에스마(ESMA) 추모관의 모습. 에스마추모관 누리집 갈무리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에스마(ESMA) 추모관의 모습. 에스마추모관 누리집 갈무리

아르헨티나 정부가 현재 인권 행사가 열리는 행사장 등으로 활용되는 에스마 추모관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한 것은 민주주의를 되찾은 지 40주년을 맞아 당시 참상이 결코 반복되면 안 된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유네스코의 발표 후 뉴욕 유엔총회 연설에서 “아르헨티나의 그 누구도 에스마에서 경험한 공포를 잊거나 부정하지 않도록 기억은 계속 살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3년까지 이어진 군부독재정권의 악행으로 인한 희생자는 약 3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군부 쿠테타가 발생한 3월24일을 ‘진실과 정의 기억의 날’로 지정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올해로 민주화를 이룬 지 40년이 된 아르헨티나는 지난 22일 대선을 치렀다. 아르헨티나 국민 100명 중 74명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처럼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겪은 한국은 지난 1월 유엔 강제실종방지협약에 가입했다. 국가 권력에 의한 감금·납치 등 범죄를 방지하는 국제사회 연대에 뒤늦게나마 참여한 것이다. 와이셀피츠 대사는 “인권 존중과 수호를 위해 아르헨티나와 한국이 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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