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스러운 소녀의 눈빛, 암실에서 빛난 인간 창의성을 말하다[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바로크 예술은 진보보다는 후퇴, 창의보다는 답습?
페르메이르는 ‘카메라 오브스쿠라’ 통해 혁신을 그려
뉴턴의 과학과 만난 화가의 꿈, 그 시대 초상이 되다
바로크(Baroque) 시대는 17세기 초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건축, 음악, 춤, 그림, 조각, 문학의 스타일을 뜻하는 바로크주의(Baroquism)가 특징이다. 검소를 강조했던 개신교 미술의 금욕성과 간결함에 대항하기 위해 구교(가톨릭)에서 지지해주던 양식이었는데, 밝음과 어둠의 강한 대조, 역동적인 움직임, 풍부한 미세 묘사, 깊은 색감으로 경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두드러진다. 유럽을 무려 천년 동안 “암흑기”라고 불리는 정체기에 머물게 했던 가톨릭 신정(神政)이 밖에서는 “모든 것의 척도는 인간”임을 선언한 인본주의의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부활) 운동으로부터, 안에서는 “믿음으로만”을 외치며 구교의 허례를 고발하는 개신교 운동으로부터 오랜 기간 지켜온 그 절대적 지위를 급격히 잃어가고 있을 때, 이 흐름을 막아보고자 주도한 문화적 부흥의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아마 바로크가 진보보다는 후퇴를, 창의보다는 답습의 모습을 지닐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사실도 그러했을까?
바로크의 대가 페르메이르
네덜란드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1632~1675)는 렘브란트(1606~1669)와 함께 네덜란드 황금기로 불리는 시대에 활동한 제일 위대한 바로크 화가로 꼽힌다. 페르메이르는 비록 풍요롭게 살지 못한 채 요절하였으나 아주 비싼 물감을 쓰기도 하면서 바로크 시대답게 특히 빛의 효과를 아주 풍부하고 세밀하게 그려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바로크 예술이 과거로의 회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근거를 페르메이르의 그림들에서 찾아볼 수 있고, 오늘 설명하듯 과학과 예술이 합쳐서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이끈 혁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로서 페르메이르의 작품 ‘레이스 뜨는 여인’(1669년작)을 보자. 이 작품에서도 페르메이르 그림들의 특징인 아주 자세한 묘사를 통한 현실감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여인의 손과 얼굴을 기준으로 화가의 눈에 가까워지거나 그로부터 먼 부분이 뿌옇게 그려진 것이 현대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는 점이 예술사가들이나 나 같은 과학문화 전문가의 관심을 끈다. 혹시 페르메이르는 진짜로 사진가였을까?
지금의 우리에게 익숙한 카메라는 눈에 보이는 장면을 순간적으로 기록해내는 기능이 있다. 센서에 닿는 빛을 디지털 정보의 형태로 저장하는 방식인 디지털카메라가 제일 많이 사용되고 있고, 필름이라는 셀로판 재질 위에 빛이 닿을 때 생겨난 화학 반응을 기록한 뒤 종이에 인쇄해내는 필름카메라도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페르메이르의 시대에는 아직 그 빛을 전자적으로든 화학적으로든 기록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어두운 방’, ‘암실(暗室)’을 뜻하는 ‘카메라 오브스쿠라(camera obscura)’라고 하는 장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모두 초등학교 때 만들어보기도 했을 ‘바늘구멍 카메라’도 이것의 일종인데, 빛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잘 밀봉된 상자 한쪽 면에 낸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온 바깥 풍경의 상(像)이 상자의 반대편 면에 맺히는 장비를 말한다.
그런데 이 빛을 영구적으로 기록하는 방법이 고안되기 전인 페르메이르의 시대에는 사람이 직접 그 상을 손으로 겹쳐 그리는 트레이싱을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페르메이르가 사용했던 바늘구멍 카메라는 한품에 쥘 수 있을 크기의 상자가 아니라 정말 사람이 들어가는 실제로 ‘어두운 방’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 역사를 조사하다보니 “빛은 빨주노초파남보(ROTGBIV)의 무지개로 되어있다”는 사실을(물론 나중에 빨강과 보라 사이에는 무한한 색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발견한 뉴턴이 암실에 들어가 그 유명한 프리즘 실험을 한 것도 페르메이르와 완전한 동시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보면 빛의 본성을 알아내려는 과학자와,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려는 화가의 꿈이 한 점에서 만나 ‘빛의 그림’이라는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은 숙명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예술은 희랍어에서 ‘빛의’를 뜻하는 φωτός (phōtós, 포토스), ‘그림’을 뜻하는 γραφή (graphé, 그라페)를 합친 포토그래피, 즉 ‘사진’이 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다시 페르메이르로 돌아가본다. 일생에 쉰 점에 못 미치는 그림을 완성했고, 지금까지 서른 네 점만 살아남은 과작(寡作)의 거장이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영감을 주고 있는데, 제일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로 1665년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함께 서양회화사에서 제일 신비스러운 여성의 얼굴을 담고 있는 것으로 회자된다. 기품 있는 모나리자가 짓고 있는, 그 뜻을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인해 그녀의 정체에 대한 수많은 가설이 제기되어왔듯(심지어 다빈치 스스로가 여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겼을 아랍식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어깨를 살짝 돌린 채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살포시 입술을 벌린 이 소녀가 누구인지를 두고 상상의 날개를 펼쳤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 소녀가 누구였는지, 무슨 행동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이 그림의 배경은 어디인지 명확한 정답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페르메이르는 이 소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어떠한 단서를 남긴 적이 없기도 하고, 설령 그런 것이 있더라도 ‘그림으로서만 말을 하는’ 화가의 작품으로부터 무엇을 느끼는지는 오롯이 감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페르메이르는 그림을 남기고, 우리는 그것을 마음껏 해석할 자유를 얻은 것이다.
“1665년, 세계 최대의 무역국가가 되어 풍요로운 네덜란드 공화국의 황금기. 델프트시(市)의 거리는 오늘도 이국의 진귀한 물건들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분주한 시장 길에서 조심조심 걸어가던 남자의 눈에는 머리에 처음 보는 외국의 것 같은 장식을 한 소녀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누구일까? 요즘 활발해진 교역 덕분에 델프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아랍 상인이 함께 데려온 가족일까? 인파 사이로 소녀가 들어가 사라져버리면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서둘러 소녀를 향해 달려간 남자는 소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네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이 남자와 눈을 마주친 소녀의 귀에 달린 조약돌만 한 귀걸이는 등지고 선 해가 반사되며 반짝이고, 소녀는 처음 보는 남자의 인사말에 조금은 놀랐지만 불편함이나 경계심이 많이 묻어나지는 않은 편안한 눈동자로 그에게 대답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린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주 친 남자의 눈에 가득 들어와버린 그 소녀가 건네려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한 예술작품은 ‘자유로운 해석가’가 되어버린 관람자의 마음에 새겨진다.
나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실물을 본 적이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라는 도시를 학회 참석차 방문 중이었는데, 우연히도 그에 맞춰 네덜란드에서 대여 형식으로 현지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그림을 보러 가겠다는 나에게, 먼저 보고 온 동료가 말해주었다. “네가 어디에 서있든 그 소녀의 눈이 너를 따라올 것이야.” 그 말까지 듣고 찾아간 미술관에서는, 아주 귀한 작품이어서 그런지 특별히 어두운 방에서 단독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어두운 방’, 카메라 오브스쿠라? 암실에서 트레이싱하던 페르메이르의 기분을 느껴보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는데, 내 동료의 말처럼 여러 각도에서 감상하기 위해 방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나로부터 그 소녀의 눈길은 떠난 적이 없었다. 그 소녀의 눈은, 한 번 만난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는 마법이었다.
진정한 창의성의 흔적은 마음에 남아 미래로 이어진다
천년이 넘는 가톨릭 교회의 신정기를 거리낌 없이 “암흑기”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현대 유럽인들은 이 암흑기를 끝내버린 르네상스기를 자기들 문명의 꽃이라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한다. 르네상스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름인 다빈치를 인류 최고의 박식가(polymath)로 부르고, 미켈란젤로의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맞닿는 장면은 인류 탄생 순간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학교에서는 한 학기 내내 학생들에게 후기 르네상스기의 대표적인 독일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업적을 교육하며 현대 독일 문명의 원류를 그에게서 찾는다.
페르메이르는 그들처럼 많은 작품을 남기지도 않았고, 천년의 역사를 뒤바꾸는 거대한 문화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가 한 일이라면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통했을 때만 볼 수 있는 자연의 새로운 모습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창의적인 혁신’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페르메이르도 몸뚱어리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비싼 물감을 마음껏 쓰면서도 굶주리지 않는 삶을 원했을 터이지만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지 못한 채 가난하게 마흔 셋의 길지 않은 삶을 마무리하면서 인류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이름이 잊혔고, 작품들이 가브리엘 메취(1629~1667)나 프란스 판 미에리스(1635~1681)의 것으로 여겨지는 수모도 당했다.
하지만 페르메이르의 눈과 손길은 인류의 기억 속에 영원히 묻혀있지 않았다. 페르메이르가 떠난 뒤 200년이 지나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1787~1851)는 은도금을 한 동판에 빛을 비춘 뒤 수은 증기를 뿌려 빛으로 그린 그림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빛의 그리기’, 즉 사진술을 만듦으로써 카메라 오브스쿠라를 통해 미술가가 본 세상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200년 전에 페르메이르가 보았던 그 모습이었다.
신권(神權)의 본질을 둘러싼 구교와 신교 간 갈등, 신과 인간 간에 벌어진 진리의 쟁탈전이 벌어지는 사이에서도 인간 창의성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 어떤 열매를 맺고 우리를 한 단계 진보하게 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혁신의 눈동자는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는다.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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