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유행민감] 넷플릭스가 영화를 ‘삭제’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사라졌다. OTT 세계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한국서 서비스하는 모든 OTT 플랫폼을 구독 중이다. 시작은 넷플릭스였다. 토종 OTT 왓챠가 다음이었다. 두 플랫폼만 있을 때는 신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저렴한 구독료를 내고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콘텐츠가 이렇게 싸도 괜찮냐는 비평가스러운 고민을 잠시 하긴 했다. 아주 잠시 말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시는 게 사람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속담은 너무 오래된 것이라 MZ세대 독자를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더해야 할 것 같다. 양잿물은 서양에서 들어온 잿물이라는 뜻이다. 잿물은 나무를 태운 재에 물을 부어 침전시킨 뒤 걸러서 만든 물이다. 성분은 수산화나트륨이다. 독극물이다. 마시면 죽는다는 소리다.
나는 OTT라는 양잿물을 적극적으로 들이켜기로 결심했다. 넷플릭스가 진출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 의견은 나뉘었다. 한국 콘텐츠도 별로 없는 미국식 구독 서비스가 한국 시장서 잘될 리 만무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반대였다. 세상이 바뀌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정치와 사상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며 산다. 물론 정치와 사상은 세상을 바꾼다. 그와 동시에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테크놀로지다. 이를테면 20세기 후반 여성 해방을 불러온 건 1960년대 여성주의 운동인가 아니면 비슷한 시기 발명된 경구피임약인가.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건 불가능하다. 역사는 여러 가지 층위로 진화한다. 다만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영향력을 정치나 사상에 비해 조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비평가들은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미국의 뉴아메리칸 시네마 같은 경향을 역사책에 중요하게 기술한다. 몇몇 작가들이 이끈 영화적 움직임이 역사를 바꿨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것만큼 중요하게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은 테크놀로지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의 변화, 무거운 카메라에서 가벼운 카메라로의 변화, 디지털 특수 효과의 발명 등은 영화라는 미디어를 새롭게 진화시켰다. 세상은 사상적 작가들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기술적 장인들의 세계이기도 하다. 나는 OTT가 영화의 새로운 진화를 이끌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소비자가 그걸 거부하기는 힘들 터였다. 나도 소비자다.
나는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디즈니 플러스를 구독했다. 애플 티브이 플러스를 구독했다. 티빙을 구독했다. OTT 플랫폼은 케이블보다 저렴하게 많은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모든 미디어 기업이 자체 OTT 플랫폼을 론칭하자 콘텐츠는 더는 저렴한 것이 아니게 됐다. 그냥 새로운 케이블이 되어버렸다. 몇몇 서비스는 특정 콘텐츠를 보려면 개별적으로 돈을 더 내야 한다. 이게 무슨 OTT인가. 미디어 회사들은 OTT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결국 과거와 똑같은 장사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조삼모사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사자성어도 너무 오래된 것이라 MZ세대 독자를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다. 이 정도는 구글 검색으로 찾아보시길 부탁드린다.
더 큰 문제를 발견한 건 얼마 전이다. 왓챠에서 내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다시 보던 영화가 사라졌다. 데이비드 로버트 미첼이라는 감독이 2014년에 내놓은 ‘팔로우(It Follows)’라는 호러 영화다. 10대들 사이에서 성관계로 전염되는 저주를 소재로 한 영화다. 나는 이 영화가 2010년대 최고의 장르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설정은 비교적 평범한데 풀어내는 방식이 아주 창의적이었다. 몇 주 전 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생각하고 왓챠에 접속했다. 없었다. 사라졌다. 왓챠와 해당 영화의 계약이 끝난 것이다. 다른 OTT에도 없었다. 올레비티에도 없었다. 이제 ‘팔로우’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DVD를 사는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나는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인간형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몇 년 전 DVD 플레이어를 적극적으로 없애버렸다. 물리적 미디어 시대는 끝났다고 적극적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더는 DVD라는 물리적 미디어를 구매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예상했다. 선무당이 적극적으로 사람 잡는다. 내 속의 적극적 무당이 나를 잡았다. OTT 플랫폼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보관하고 이용자들이 언제든 볼 수 있게 하는 ‘아카이빙’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디지털 아카이빙에도 돈이 든다. 저작권 수수료를 지불하는 데도, 데이터를 보관하는 데도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작권 수수료는 많이 드는데 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영화들은 지워나갈 수밖에 없다. 디즈니 플러스는 올해부터 많은 영화와 시리즈를 삭제하기 시작했다. OTT 플랫폼이 너무 많이 생기면서 발생한 손익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이미 넷플릭스는 오래된 콘텐츠를 수시로 삭제해 왔다. 요즘 인터넷 매체들은 ‘다음 달부터 넷플릭스에서 볼 수 없는 영화 리스트’ 같은 기사들로 클릭 수를 짭짤하게 번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꼭 여러 번 보아야 한다”고 설법하던 소피아 코플라 감독의 걸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도 더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없다. 우리는 OTT가 더는 케이블이 방영하지 않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혁신이라고 여겼다. 믿음은 배신당했다. 나는 지금 DVD 플레이어 가격을 인터넷으로 다시 검색 중이다.
물리적 미디어는 사라져간다. 결국 모든 것은 디지털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이 된 세상에서 누군가 문명의 전원을 꺼버린다면 문명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세계대전 전조를 보며 요즘 나는 지난 세기 냉전 시대에나 걱정했던 핵전쟁 이후 시나리오들을 다시 떠올리고 있다. 핵전쟁 이후에도 이 보잘것없는 칼럼을 후세에 남기려면 조선일보는 계속해서 종이 신문을 발행해야만 한다. 종이 신문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조롱받고 있지만, OTT와 인터넷은 담아낼 수 없는 이 종이는 종말 이후에도 인류 지성을 전달하는 파피루스가 될 것이다. 물론 이 칼럼이 후세에 남을 가치가 있는 인류 지성의 흔적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사실은 꼭 밝히며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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