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제로·직원 해고 딛고… ‘태양의 서커스’ 귀환
‘태양의 서커스’의 앞길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길거리 유랑 공연으로 시작해 20여 년 만에 세계 주요 대도시에 44개의 쇼를 동시에 공연하는 연 매출 10억달러 규모의 글로벌 기업이 됐다. 값싼 오락거리로 폄하되던 서커스를 종합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은 이 회사도 공평하게 덮쳐왔다. 쇼는 모조리 중단됐고 매출은 ‘0′이 됐다.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직원의 95%인 4679명을 해고했다.
“전쟁은 두 나라를 무너뜨리고, 태풍은 경로상 여러 나라를 폐허로 만들지만 코로나는 온 세계를 멈춰 세웠어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지만, 손 쓸 도리가 없었죠.” ‘태양의 서커스’ 다니엘 라마르(70) 부회장을 23일 만났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의 2500명 수용 규모 빅탑 시어터에서 새 쇼 ‘루치아’ 개막을 앞두고 방한한 그는 “팬데믹의 시작점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다 끝났다’고 했지만, 우린 오히려 더 강해져서 다시 일어섰다”고 했다. “투자자들이 우리 브랜드를 보고 12억5000만달러를 투입했고, 1년여를 버텼습니다. 지금은 직장을 옮긴 일부 행정직을 빼고 코로나 해고자의 85%를 재고용했어요. 특히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들은 대부분 돌아왔죠. 올해 매출은 9억9000만달러 수준이 될 겁니다.” 라마르 부회장은 “우리는 완전히 회복했다. 그게 지금 내가 당신과 마주 앉아 활짝 웃을 수 있는 이유”라고 했다. ‘태양의 서커스’ 공연 재개 소식을 전했던 언론 보도 헤드라인은 “인터미션은 끝났다”였다.
프랑스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의 김위찬 교수가 “오래된 예술 콘텐츠 서커스를 현대적으로 재발명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자 ‘블루 오션 전략’의 상징”으로 평가했던 회사. 이젠 코로나 극복을 통해 불황이 일상화된 시대 모든 기업의 제1 덕목인 ‘회복 탄력성(resillience)’의 모범이 됐다. “단기 실적 압박요? 3년 걸릴 회복에 2년도 안 걸렸는데 지금 제일 행복한 건 우리 투자자들일 걸요? 우리에게 압박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예술적 압박뿐입니다.”
이번 쇼 ‘루치아’는 대규모 물을 동원한다는 점, 멕시코 정부와 협약을 맺고 한 나라의 문화를 주제로 꾸몄다는 점 모두 투어 쇼 최초다. 이 예술기업에도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 루치아(Luzia)는 스페인어로 빛을 뜻하는 ‘luz’와 비를 뜻하는 ‘lluvia’를 합친 말이다. 멕시코의 뜨거운 사막, 야생동물, 강렬한 원색, 화려한 원주민 문화, 사후세계에 대한 독특한 신앙과 풍습 같은 것을 화려한 비주얼과 매혹적인 곡예 퍼포먼스로 130분 공연에 빼곡히 담았다. 2016년 초연 뒤 이미 세계 9국 150만명이 관람했다. 국내 ‘루치아’ 티켓은 벌써 10만 장 넘게 팔려서 사전 매출 150억원을 넘어섰다. 각종 장비만 2000톤. 현지 제작 분량을 빼고도 컨테이너 18개 분량.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 47명을 포함해 투어팀은 19개 국적 124명에 달한다. 연말까지 서울 공연을 마치면 내년 1월 13일부터 부산 관객과 만난다. 부산 공연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 직원들과 마찰은 없을까. “워라밸? 그건 전통적인 직업의 이야기죠. 태양의 서커스에는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건 우리의 직업(job)이 아니라 열정(passion)입니다. 크리에이티브 팀이 구성되면 함께 먹고 자며 끊임없이 연구해 콘셉트를 개발해 경영진에게 제시하는 데 1년의 시간을 줍니다. 최대치의 자율을 부여하고 진행 상황 체크만 하죠. 그 뒤 6개월에서 1년에 걸쳐 몬트리올에서 실제 공연을 올려 보며 완벽하게 만든 뒤에야 세계로 내보냅니다.”
한 번 투어가 시작되면 오랜 기간 함께 세계를 여행하게 돼 사내 결혼도 많다. 지금 한국 투어팀에도 아이 딸린 가정이 다섯 집이나 된다.
코로나 이전 가장 긴박했던 위기를 묻자, 그는 동일본 대지진을 떠올렸다. 당시 ‘태양의 서커스’는 일본에서 상설 쇼와 투어 쇼를 하나씩 진행 중이었다. “캐나다 언론은 ‘대사관은 우리 국민 철수 여부를 결정하는데 48시간이 걸렸지만, 태양의 서커스는 24시간 만에 전원 귀국 비행기에 태웠다’고 보도했어요. 재난 뒤 3주 만에 일본으로 돌아가 신속히 공연을 재개한 것 역시 자랑스러운 기억입니다.”
한국 문화를 주제로 한 태양의 서커스를 보게 될 날도 올까. “한국은 영화 ‘기생충’을 만들고 뉴욕에서 밴드 공연을 매진시키는 대중문화의 힘이 인상적이죠. 독창적인 예술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한국을 주제로 한 공연을 만드는 건 우리의 오랜 꿈입니다.”
극장보다 휴대폰 숏폼 동영상을 선호하고 인공지능이 예술을 모방하는 시대에 대규모 극장 공연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할까. 그는 “당신 바로 눈앞에서 고통받고, 분투하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공연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태양의 서커스’를 세 단어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창의성’ ‘인간의 퍼포먼스’ 그리고 ‘감성’. 관객이 창의적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 그것이 아주 단순하지만 태양의 서커스뿐 아니라 모든 공연의 본질입니다. 우린 앞으로도 거기에 충실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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