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詩가 그리워 줄을 선다
29일까지 총 13회 공연 전부 매진
오는 29일까지 단 13회 공연.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의 142석은 모든 공연이 일찌감치 매진됐다. 작가 9명이 고(故) 기형도(1960~1989)의 시 9편을 각각의 짧은 이야기로 만든 극단 맨씨어터(대표 우현주)의 옴니버스 연극 ‘기형도 플레이’(연출 김현우). 시인을 추억하는 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 두 행으로 끝나는 시 ‘질투는 나의 힘’은 아마도 기형도의 가장 유명한 시. 연극에선 관객이 가장 크게 자주 웃는 에피소드다.
무대 위 남자는 40대 초입 나이. 신춘문예에 떨어졌다고 사흘 밤낮 만취한 채 과방에서 통곡하는 짓 따위 애저녁에 졸업했어야 하지만, 여전히 젊은 치기의 동굴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신입생 시절, 복학생이던 남자를 만나 잠시 사귀었던 여자가 남자를 위로할 때 읽어준 시도, 남자가 시작(詩作) 강사로 일하며 어린 학생들을 꼬드길 때 써먹은 시도 ‘질투는 나의 힘’이었다. “난 여전히 벼랑 끝, 칼날 위에 서 있다”고 짐짓 비장하게 말하는 남자를 향해 이미 등단 소설가인 여자는 피식 웃으며 받아친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작두 타?”
“너만은 나를 이해했잖아. (이마를 가리키며) 내 머릿속 이 자폭 버튼, 이걸 네가 지켜줘서 내가 살고 있잖아!” 남자가 포기하지 않자, 여자는 손가락으로 남자의 이마를 지그시 누른다. “자, 눌렀어, 자폭해.” 객석은 폭소의 도가니다. 어떤 시는 너무 유명해진 탓에 학대당한다.
스물아홉 살 생일을 엿새 앞둔 새벽,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기형도의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1980~90년대 젊은이들에게 특별했다. 장윤현의 영화 ‘접속’, 서태지의 ‘난 알아요’,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과 은희경의 ‘새의 선물’처럼, 기형도는 한 시대와 세대의 집단 기억을 사로잡은 문화 현상이었다.
침묵으로 강의하는 교수에 관한 시 ‘소리의 뼈’에 관한 에피소드는 상큼하다. 한 학기 내내 침묵의 강의를 들은 뒤 헤어진 남녀는, 오토바이 헬멧과 음소거 헤드폰을 쓰고 재회한다. 처음엔 엇갈리며 투닥대던 두 사람의 대화는, 둘 다 위층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부터 금붕어 헤엄치는 소리까지 주변의 사소한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다 들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단 걸 알게 되면서 급진전된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쿵쿵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숨기지 못한다. 멀어졌던 두 마음이 다시 연결된다.
서점을 배경으로 두 여배우가 수많은 인물을 오가며 장르적 분위기를 바꿔 가는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죽음을 기억하는 엇갈리는 태도에 관해 말하는 ‘빈집’ 등도 흥미롭다.
‘흔해빠진 독서’ ‘바람의 집’ ‘기억할 만한 지나침’ ‘위험한 가계·1969′ ‘조치원’…. 기형도의 아름다운 시가 그대로 짧은 이야기의 제목이 되고, 시의 일부가 극의 중요한 모티브로 녹아든다. 시를 연기할 때, 대학로에서 잔뼈 굵은 배우 9명의 표정에도 시와 시인을 향한 애정이 가득하다. 이 단단한 서사와 창작진의 애정이, 꽉 찬 객석 뒤쪽 열에선 배우들 무릎 위밖에 안 보이는 비좁은 소극장에 매진 행렬을 이뤄낸 이 연극만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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