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 그날, 궁정동에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있었다 (꼬꼬무) [종합]
[스포츠서울 | 김태형기자] ‘꼬꼬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된 그날을 재조명했다.
2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는 ‘궁정동의 목격자들 - VIP: 할아버지’ 편으로 현대사의 미스터리한 사건이자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10.26 사태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이야기 친구로 김광규, 이현이, 넉살이 출연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다. 총을 쏜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총에 맞은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대한민국 권력의 2인자였던 그가 일으킨 사상 초유의 사건은 결코 단순한 스토리가 아니었다. 10.26 사태에는 최상위 권력자들에게 가려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그날 궁정동 안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행사의 만찬을 준비하던 요리사, 안가를 지키던 경비원들. 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른채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 아빠였다. 단지 충성을 다할 뿐인 그들은 뜻하지 않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먼저 1978년 일류 호텔 주방장 출신 요리사 이정오 씨는 종로에 신장개업한 식당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호텔보다 높은 급여에, 사원 아파트까지 제공한다는 말에 이정오 씨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1년 후 어느 날, 식당에서 ‘할아버지’로 통하는 단골 VIP의 예약을 받게 됐다.
이정오 씨는 ‘할아버지’가 평소 좋아하는 음식들로 만찬을 준비했다. 음식을 다 내보내고 한숨을 돌리던 순간 ‘탕!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이정오 씨의 허리에는 각목으로 맞은 듯한 강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있던 동료들이 모두 총을 맞고 쓰러져있었다.
김재규는 거사를 치르기 전 부하들을 시켜 청와대 경호원들을 쏘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상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원은 총 4명이었다.
2명은 경호원 대기실에, 2명은 주방에 있었다. 저녁 7시 40분경 김재규의 총성이 울렸다. 박선호 과장은 그 신호를 듣고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경호원을 쐈다. 동시에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은 주방 쪽을 맡았다. 그때 이정오 씨가 총을 맞은 것.
김재규는 상황이 종료된 후 별다른 지침도 주지 않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남산이 아닌 육군본부로 떠나버렸다. 당시 궁정동 안가 경비원이었던 유석술 씨는 “총소리가 나고 나서 우리는 누가 누구를 쐈는지는 몰랐다. 그 안에는 이미 총소리가 나고 사건이 일단 끝났기 때문에 남은 직원들이 ‘근무라도 서자’ 해서 자진해서 근무를 섰다”라고 전했다.
쓰러진 박 전 대통령을 이송한 사람은 김계원 비서실장이었고, 안가 내부를 수습한 사람은 박선호 과장이었다. 다친 이정오 씨도 병원으로 보냈고 사건을 코앞에서 목격했던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도 봉투를 주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기주는 경비원 유석술 씨를 찾아와 권총과 탄피, 김재규가 신었던 슬리퍼를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유 씨는 “설마 이 총이 김재규 부장님이 각하를 쏜 총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걸 가져와서 정원에 감춰놓으라고 그러더라. 밤이기 때문에 도구도 없고 손으로 대충 덮었다”라고 밝혔다.
“이걸 숨겨도 되는 건가란 생각은 들지 않았나”란 질문에 유 씨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때는 시키는 대로 했다”라고 답했다. 그 일로 유 씨는 다음날 헌병대에 증거은닉죄로 연행됐다.
경호원들을 사살한 박흥주,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과 뒤늦게 가담한 김태원까지 법정에 섰다. 일을 꾸민 김재규도 범행 6시간 만에 육군본부에서 체포, 법정에 섰다.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 혐의였다.
법정에 선 김재규는 “대통령 각하의 무덤에 올라설 정도로 아직까지 내 도덕관은 타락하지 않았다”라며 정권을 잡기 위한 쿠데타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각하를 제거할 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발언했다. 김재규는 건설부장관 임명장을 받던 날에도 바지 주머니에 45구경 권총을 넣고 들어갔으며, 유서도 5장 준비했다고 밝혔다.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기획할 때부터 제거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한 일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김재규는 부산에 내려가 시위 현장을 확인했다. 그는 돌아와서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김재규는 “보고를 드렸더니 각하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발포 명령을 하겠다. 대통령인 내가 명령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냐’ 하셨다.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들은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 대한민국은 1~200만 명 희생한다고 그까짓 거 문제될 거 있냐’고 이런 얘기가 나왔다”라고 전했다.
김재규는 이른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것이다.
사건 직후 재판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여기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입김이 있었다. 전두환은 10.26 사태 이후 불과 두 달 만인 12.12 신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불과 5개월 만의 재판 결과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에게는 사형이 선고됐고 유석술은 징역 3년에 처해졌다.
김재규는 “난 오늘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놨다”라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 후 한동안 봄은 오지 않았다.
3년간 독방에서 형을 마친 유석술 씨는 “큰 사건에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 좋다. 친구들한테 미안한 마음이다. 위에서 시켜서 그렇게 한 건데 사형까지 당하고 나니까 참 마음이 이루 말할 수도 없다. 매일 보던 사람들인데...”라고 전했다.
tha93@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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