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시선] 말뿐인 신사협정 안 돼야

2023. 10. 26.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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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고성 금지 합의 적극 환영
정치 후진성 인정하는 듯해 씁쓸

기자가 국회에서 신사협정이 이루어졌다고 하기에 무슨 말인가 잠시 머뭇거렸다. 바로 찾아보니 이런 것을 신사협정이라고 부르는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에 실소가 터졌다. 강압이나 거래가 아니라 매력을 발산하는 전 세계 대표적 소프트파워의 나라 대한민국의 정치문화는 오히려 하드파워에 ‘동물의 왕국’ 수준이기 때문이다. 2021년 7월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한국은 이미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선진국에 속한다고 분류되었건만 정치문화는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이른바 신사협정의 내용이란 이렇다. 24일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가 “국회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장에 피켓을 소지하고 부착하는 일, 본회의장에서 고성, 야유를 하지 않는 것에 합의했다”는 것이다.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중략) 대통령 시정연설, 여야 교섭단체 대표연설 시에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의원들이 별도 발언을 하지 않는 것에 여야가 합의했다”고 화답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초등학생들도 지키는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닌가. 이런 것을 여야의 원내대표들이 합의했다고 모처럼 대단한 혁신을 한 것처럼 홍보하는데 정작 국민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
이번 신사협정은 지난달 말에 민주당 원내대표로 홍익표 의원이 선출된 직후 김진표 국회의장이 양당 원내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처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꼭 한 달 만에 양당의 원내대표들이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인데 그 배경은 석연치 않다. 민주당의 원내대표가 새로 뽑히지 않았고 10월11일에 열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합의가 이루어졌을까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2024년 국회의원선거가 6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 각각 분위기가 나쁘자 여야가 서로 혁신 경쟁하는 쇼를 벌이는 것은 아닌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래도 오랜만에 여야 원내대표들이 상생과 화해를 위하여 합의했다는 점에서 환영하고 싶지만 이러한 설레발이 오히려 한국 정치문화의 후진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적 갈등 수준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미국의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세계 선진경제 17개국 여론조사에서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지수가 90점으로 가장 높았다. 그다음이 69점을 받은 대만이었으니 그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가늠이 된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과 미국은 사회적 갈등의 강도도 가장 강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미국 하원도 지금 역대 최악이다. 지난해 11월 중간선거를 마치고 미국 하원은 2023년 1월3일부터 5일 동안 무려 15번 투표를 한 뒤에나 가까스로 의장을 선출했다. 의장을 뽑는 데 1번 이상 투표한 것이 1923년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 선출된 케빈 매카시 의장이 같은 공화당의 친트럼프 강경파에 의하여 해임되는 데는 9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10월 내내 미국 하원은 후임 의장을 선출하기 위한 투표를 벌였고 이번에는 강경파에 반대하는 공화당 중도파의 비토로 벌써 후보 세 명이 낙마했다. 3주 만인 어제야 비로소 네 번째 후보인 마이크 존슨을 의장으로 간신히 선출했다. 그나마 한국의 국회가 미국 하원보다 낫다고 위안을 삼고 싶나.

이제 국민은 여야 원내대표들의 신사협정이 얼마나 오래 갈지 지켜볼 것이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끝난 뒤 일주일 만에 대통령도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떠한 비판에도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며 반성도 하고 소통도 하겠다고 했다. 국민은 대통령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그 자세를 유지시킬지 주목하고 있다. 첫 시험이 별로 머지않다. 바로 다음주 화요일인 31일에 대통령이 국회에서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한다. 대통령이 얼마나 변화할까, 국회에서 정말 고성과 야유가 사라질까. 다음 달 초부터는 국회에서 민주당이 노란봉투법과 방송법 처리를 강행할 태세이고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막겠다고 한다. 소프트파워의 길이 열릴까, 하드파워의 대격돌이 이어질까.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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