定價 이젠 없어요...데이터 돌려 가격표 10분마다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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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음식을 파는 미국의 식당 체인 ‘피아다’는 작년 6월 새로운 가격제를 도입했다. 앱으로 배달을 주문하는 고객 대상으로 같은 음식이라도 손님이 몰리는 시간대엔 가격을 인상하고, 반대로 한가한 시간대엔 가격을 낮게 적용한다. 달라지는 음식 값은 평소 고객들의 주문 패턴을 분석하는 인공지능(AI) 기반 소프트웨어가 제안하는 가격을 참고해 결정한다. 이 회사는 이렇게 ‘음식 값 변동제’를 시행한 이후 배달 쪽에서 마진이 두 배로 늘었다.
피아다처럼 시장 상황에 따라 가격을 탄력적으로 자주 바꾸는 판매 방식을 ‘다이내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유동 가격제)’이라고 부른다. 예전엔 성수기·비성수기를 구분하는 항공·호텔 업계에서 주로 썼지만 최근엔 유통, 외식, 공연 업계까지 폭넓게 다이내믹 프라이싱 전략을 도입하고 있다. IT 발전으로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데이터를 쉽게 분석할 수 있게 돼 상황별로 최적 가격을 매길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다이내믹 프라이싱이 확산되면서 정가(定價) 개념이 흔들리고 있다. 기업으로서는 수익성 개선에 도움이 되지만, 소비자 중에서는 ‘가격 인상 꼼수’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10분에 한 번씩 가격 바꾸는 아마존
다이내믹 프라이싱은 전자상거래 업종에서 가장 애용한다. 다양한 온라인 데이터를 분석해 알고리즘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가격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은 다이내믹 프라이싱 전략의 대표 주자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아마존은 실시간 자료 수백만 건을 활용해 수요 변화와 경쟁 업체 가격을 파악하고 평균 10분에 한 번씩 제품 가격을 변경한다”고 했다. 국내에선 쿠팡이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쿠팡의 가격 변동을 추적해 보여주는 애플리케이션이 나왔을 정도다.
최근엔 오프라인 유통 업체로도 다이내믹 프라이싱이 확산하는 추세다. 화면으로 표시하는 전자 가격표가 등장하면서 가격 바꾸기가 훨씬 쉬워졌기 때문이다. 일본 대형 가전 유통 업체인 노지마는 2019년 모든 매장의 상품 표시 장치를 원격 조정이 가능한 디지털 액정으로 교체하고 다이내믹 프라이싱 전략을 도입했다. 매출·재고 상황, 경쟁사 가격 등을 분석해 액정에 표시되는 가격표에 반영한다. 월마트 역시 내년까지 500여 매장에 전자 가격표를 도입할 예정이다.
외식 업계도 마찬가지다. 미국 식당 체인 누들앤드컴퍼니는 올해 말까지 모든 매장에 디지털 메뉴판을 설치해 음식 값을 바꾸는 전략을 테스트할 예정이다. 요즘엔 공연 티켓이나 택시 가격도 수요에 따라 변동한다. 미국 티켓 판매 플랫폼 티켓마스터는 일부 공연 좌석을 수요에 따라 실시간으로 가격이 바뀌는 ‘플래티넘 좌석’으로 판다. 우버는 교통 흐름을 파악해 승객이 많이 몰리는 지역의 요금을 올린다.
음식 값도 시간대별로 달라진다
다이내믹 프라이싱 전략을 가동하려면 데이터 분석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서 관련 소프트웨어 회사가 속속 생기고 있다. 이스라엘에 본사를 둔 퀵리자드는 이케아·세포라 등에 다이내믹 프라이싱용 소프트웨어를 제공한다. 매출 목표, 수요, 경쟁사 가격 등을 분석해 최적 가격을 제안한다.
역시 이스라엘에 기반을 둔 스타트업 웨이스트리스는 변동 가격제로 신선식품 손실을 줄이는 데 집중한다. 예컨대 회사 고객사 중 한 곳인 네덜란드 식료품 매장 호오흐플리트(Hoogvliet)는 작년 말부터 구매 패턴, 유통기한, 실시간 재고 같은 데이터를 분석해 신선식품 매대의 디지털 가격표를 조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폐기되는 제품을 줄이고 매출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외식업계용 소프트웨어도 이미 가동 중이다. 미국 푸드테크 스타트업 ‘소스(Sauce)’는 식당의 주문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간대별로 다양한 가격을 책정해준다. 회사에 따르면 한 샌드위치 체인은 소스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가장 한가한 시간대엔 가격을 5% 할인하고 가장 바쁜 시간대에는 10~20% 인상했다. 시범 기간 3개월 동안 주문량은 7%, 매출은 12% 증가했다.
MIT 연구진은 항공사가 구매 시점 같은 단순 정보만 반영했던 종전 가격 전략 대신 수요, 지불 의향 등을 포함하는 다이내믹 프라이싱을 구현하면 매출이 1~4% 증가한다고 했다. 연구진은 “가격에 민감한 여행자의 신규 예약을 늘리는 동시에 가격 탄력성이 낮은 여행자가 더 높은 가격으로 구매하도록 유도해 항공사 수익을 늘릴 수 있었다”고 했다.
가격 급등하면 반발 부르기도
소비자들은 대개 다이내믹 프라이싱을 반기지 않는다. 가격이 낮아질 때보다 높아질 때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평가 업체 캡테라가 올 초 미국 소비자 900여명을 대상으로 식당의 다이내믹 프라이싱 전략에 대해 물은 결과, 응답자의 52%가 ‘가격 폭리 같다’고 답했다.
실제 다이내믹 프라이싱으로 가격이 급등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예컨대 올해 미국 뉴욕에서 열린 가수 드레이크 공연은 일반 티켓 가격은 원래 70~330달러로 책정돼 있었지만, 티켓마스터가 판매한 플래티넘 좌석 가격은 1200달러까지 치솟았다.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공연에 가고 싶어 하는 팬이 많기 때문이다.
우버는 지난 2017년 6월 영국 런던에서 테러가 발생했을 때 실시간으로 요금을 올렸다가 비윤리적 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테러 발생 직후 해당 지역을 떠나려는 이용자가 급증하자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요금을 올린 것이다.
가격이 널뛰다 보니 정부가 개입을 시도하는 일도 생겼다. 이탈리아 정부는 엔데믹발 여행 수요 폭발로 항공권 가격이 급등하자 지난 8월 일부 국내선을 대상으로 성수기 요금을 평소 요금의 2배 이내로 제한하는 일종의 가격 상한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항공사들의 반발이 거세 철회하긴 했지만, 약간 더 느슨한 방식으로 규제하는 수정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가격이 너무 자주 바뀌면 소비자로선 적정한 가격에 산 것인지 계속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가격 변동 범위가 너무 넓지 않도록 알고리즘을 만들고 언제 싸게 살 수 있는지 등의 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해 소비자 선택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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