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민생의 공허함
지난 11일 치러진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후보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17.15%포인트 차이로 대패했다. 그런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에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돌연 ‘민생’을 강조하고 나섰다. 23일 한 달여 만에 당무에 복귀한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정치권의 가장 큰 과제는 국민의 삶을 지키고 개선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민생’을 들고 나왔다.
여야가 공히 민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어쩐지 공허한 정치적 수사로 여겨지는 것은 왜 그럴까? 아마 국면 전환용으로 민생을 이야기하거나 피상적이고 실효성 없는 민생 대책을 남발해 왔던 우리 정치권에 대한 믿음과 인내가 소멸하고 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민생 문제로 정치권은 고물가와 경기 침체를 꼽을 것 같다. 여야 공히 가격 통제로 물가를 잡아야 한다고 맞장구칠 수도 있다.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의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도 풀어야 한다고 국민의힘은 주장할 것이고, 민주당은 재정을 대폭적으로 풀어서 경기 부양의 마중물을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한마디로 너무나 무책임하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다. 전기료를 원가 미만으로 유지하고 유류세 인하를 지속해서 현재의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정말로 믿고 정치권이 그런다면, 기성 정치권에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다. 가격 통제는 극단적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쓸 수 있는 수단이나 통상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책일 수 없다. 인플레이션과 고물가를 이야기하면서도 경기 진작을 위해 감세하거나 재정 지출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경제학의 ABC도 모르는 사람들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국민이 잘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개도기 때의 단순한 경제구조와 시장의 미형성 시절에 통용되었던 정책을 경제가 성장하고 구조가 바뀐 오늘에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우리 경제 관료를 볼 때 절망하는 것과 이런 경제 관료의 자질이 우수하다는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는 정치인의 말을 들을 때 절망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절망스러운지 모르겠다.
시장에 개입해, 가계부채 문제를 제어하고, 중소기업·소상공인 부실 채권 문제를 막고, 부동산 PF 대출과 부동산 부양 문제도 해결하려는 경제관료들의 잔재주 부리기는 결국 정상적으로 이자율 정책을 쓸 수 없도록 만들고, 우리 경제를 ‘비정상적인’ 시장경제로 몰고 가고 있다.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이자율을 올리고, 높은 이자 부담에 따른 한계 기업의 도산이 일어나도, 이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한 경제구조를 만드는 것이 지금 필요한 과제이다. 기업이 망하면 안 된다는 황당한 경제관을 가진 정치인들은 시장경제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민생을 강조하는 정치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또 있다. 눈앞에 보이고 당장에 부딪히는 문제와 피상적인 해법에 매몰되어서 정말로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와 미래 문제를 외면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제조업 위기, 사회 양극화 그리고 탄소 중립으로 이행이라는 보다 근본적이면서 미래의 문제이기도 한 난제를 해소하지 못한다면, 저성장·저출생·지방소멸 등의 피상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정치인들이 제아무리 민생을 외쳐도 더욱 악화될 뿐이다.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형성된 재벌과 재벌 중심의 경직된 산업 및 경제구조를 유지한 채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탄소중립과 RE100 요건을 맞추기 위해서 재벌 대기업들은 새로운 공장을 미국 등 국외에 짓고, 국내에서는 단가후려치기와 기술탈취로 고탄소배출 산업의 가격 경쟁력을 활용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티려 할 것이다. 결국 국내 산업은 몰락하고, 한국의 동남권을 중심으로 ‘러스트 벨트’화가 진행될 것이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재벌의 경제·사회·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감히 누가 재벌들에 맞설 수 있을까?
그때가 되어도, 정치인들은 ‘민생’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우파는 감세와 규제 철폐로 경기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좌파는 재정을 풀어서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때가 되면, 좌우 정치세력이 나라를 교대로 거덜 낼 것이고, 정치적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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