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착시와 직시
최근 정치권 모습은 좀 낯설다.
윤석열 대통령은 민생, 반성, 소통 메시지를 냈다. “저와 내각이 돌이켜보고 반성하겠다”(17일),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18일), “많이 반성하고 더 소통하려 한다”(18일). 국민의힘은 정쟁성 현수막을 철거했고, 여야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고성·야유를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11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 일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상황이 낯선 건 그간 정치권이 보여준 모습 때문이다. ‘비호감 경쟁’으로 치러진 지난해 대선 후에도 국민들은 여야 간 극한 대치와 이로 인한 정치 실종을 지겹도록 봐왔다. 그래서 지금 착시일 수 있다. 여야가 바짝 엎드리는 건 6개월도 안 남은 총선 때문일 터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여야가 건전한 쇄신 경쟁을 하고, 상식의 정치를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만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태세 전환’의 애매함이다. 강서구청장 선거는 여당의 17%포인트 차 완패였다. “윤 대통령의 패배”라는 게 중론이다. 오만과 독선에 대한 민심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어떤 선거 결과든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내놨다. 한편에선 “일개 구청장 선거” “송파구청장 선거였으면 이겼다” 같은 말들이 나왔다. 민심을 잘 읽고 그 숨은 뜻을 푸는 게 정치의 일이다. 그런데 엉뚱한 진단을 하고, 처방도 임명직 당직자 교체같이 엉뚱하다. 그러니 당내에서도 “드라마 <아내의 유혹>처럼 장서희씨가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이라고) 나온 듯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다.
국민은 지켜보고 있다. 윤 대통령의 달라진 메시지가 나온 시기(17~19일) 이뤄진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는 뚜렷해진 민심의 경고를 보여준다. 윤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평가는 직전 조사보다 3%포인트 하락한 30%로 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특히 대구·경북(TK)에서도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서는 등 지지층 이탈 조짐을 보였다.
여권의 인식과 대응에서 이상 신호는 이미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보궐선거 전후 상황을 보면 윤 대통령은 이렇게까지 패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식파킹 의혹 등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난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카드를 갖고 있었을 거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는 ‘인의 장막’이 있다는 세간의 추측이 맞을지 모른다.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전 구청장을 사면하고 재출마시키면 선거에서 진다는 건 상식이다. 대통령 주변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던 셈이다. 지금 애매한 태세 전환도 마찬가지다. 인체에 비유하자면 외부자극을 지각해 뇌로 전달하고 반응하도록 하는 신경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방증이다.
윤 대통령의 달라진 메시지는 자기고백이다. 30%대의 낮은 지지율에도, 누가 뭐라 해도 신경 안 쓰고 주먹을 휘두르던 그였다. “골프로 치면 300야드 날릴 실력이 있는데 공이 날아가는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 없다”며 이념의 중요성을 설파하던 그였다. “일개 구청장 선거” 때문에 이럴 거면 당선 이후 1년5개월 동안 안 하고 뭘 했나. “국민이 늘 옳다”라니, 그걸 이제 와서 깨달았다는 건가.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은 윤 대통령이 ‘이념 투사’가 된 것을 두고 “늦깎이 의식화”라고 했다. 뚜렷한 철학이나 이념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메시지 전환도 너무나도 가볍다.
“국민이 기대하셨던 처음 윤석열 모습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국민들께서 듣고 싶어 하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변화된 윤석열 보여드리겠습니다.”
윤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1월 한 말이다. 지금 나오는 메시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이후로 뭐가 변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뭘 ‘반성’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협치의 시금석으로 지목됐던 제1야당 대표와의 만남은 거부하고 있다. 해외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 달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다. 이태원 참사 시민추도식은 “정치적 성격”이라며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 KBS 사장 내리꽂기, 언론에 대한 잇따른 압수수색 등 언론 길들이기 논란은 진행형이다.
국정기조 전환 없는 태세 전환은 위기모면용 보여주기일 뿐이다. 일단 소나기부터 피하고, 좀 살 만해지면 다시 본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척하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한다. 얼렁뚱땅 넘어가면 국민은 다 안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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