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정치적 허구와 예측 복종 시대의 표현

기자 2023. 10.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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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시’의 포스터. 파라마운트+ 제공

“1954년 오펜하이머가 견뎌야 했던 고통과 치욕은 매카시 시대에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한 구절이다. 원자폭탄 ‘셀럽’ 오펜하이머가 군축을 주장하자 미국 정부는 불법 도·감청과 미행을 감행해 8000쪽이 넘는 자료를 수집했다.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의 분노가 동력이었다. 한편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데이비드 그랜의 역사 논픽션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그랜은 백인 사회가 협잡해 아메리칸 원주민의 부와 생명을 빼앗았던 범죄사를 기록했다. 백인들은 오세이지가의 석유와 돈 주위로 몰려들어 정략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결혼 후 오세이지가 사람들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병을 핑계로 단 한 차례 수사도 없었다. FBI는 이 오래된 구조적 음모를 벗겨낸다. 당시 FBI 국장은 후버였다.

오펜하이머에게 일어난 일도, 오세이지가에 일어난 일도 모두 ‘역사’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후버는 악당이고 다른 한쪽에선 정의의 집행관이다. 역사가 이미 일어난 일을 기록한다면 문학은 선택의 가치를 질문한다. 질문을 통해 FBI 수장 후버의 인격적 모순이 재해석된다. 이런 가치평가는 일차적 기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기록하는 일, 언론과 역사는 이렇게 만난다. 총기와 마약으로 흔들리는 나라이지만 미국은 이 서술의 힘, 표현의 자유 덕에 지탱된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소한이자 최후의 방어막으로서 표현의 자유 말이다.

이태원 참사 1년을 앞두고 파라마운트플러스가 다큐멘터리 영화 <크러시>(Crush)를 공개했다. 그런데, 참사 당사국임에도 정작 한국에서는 예고편조차 볼 수 없다. 예고편에서 피해자의 누나는 참사는 예방할 수 있었다며 울분을 토한다. 제작진은 한국 정부와 경찰 및 소방 고위 관계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공개되는 게 금지된 건 아니지만 아무도 이 영화를 수입해 상영하려 하지 않았다.

2023년 10월26일 대통령실은 “윤석열 대통령, 이태원 1주기 추모대회 불참”을 고지했다. “정치 집회로 변경”된 게 이유다. 1주기 추모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대통령실은 이미 변경된 정치 집회로 호명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게 어떻게 불참 사유가 되며 정치 집회 변경이 무슨 의미인지 묻지 않는다. 단지 헤드라인 뉴스로 전달되고 확산될 뿐이다.

질문받지 않은 선제적 호명은 규정력을 갖는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지난 1년 내내 대통령실, 행정안전부, 국무총리는 10월29일 참사를 예측 불가했던 사고라 호명해왔다. 피해자의 이름과 얼굴을 가린 채, 부르거나 드러내면 범죄라며 엄포를 놨다. 의아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엄포는 고스란히 공포로 스며들었다. 만성적 위협 속에서 이젠 아예, 아무도, 궁금해하려 않는다. 선제적으로 가만히 있는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의 책 <폭정>에서 예측 복종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비극이라 말한 바 있다. 억압적 정부가 무엇을 원할지 미리 생각해, 요구하기도 전에 미리 내주는 것이 예측 복종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역시 전체주의적 정부는 집회를 금지하고, 정부 비판에 법적 대응을 일삼는다고 지적한다. 예측 복종과 엄포 속에서 먼저 위축되는 게 바로 사실의 기록과 해석,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재구성이다. 가장 비극적인 예측 복종이 언론의 복종인 이유이다. 언론이 겁먹을 때, 사실은 증발하고 만다.

아무도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크러시>를 묻지 않는다. 10월29일을 기억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는 게 왜 대통령이 피할 이유가 되는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질문이 절실하다. 왜 추모가 정치 집회여서는 안 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참사의 책임을 묻는 게 정치라면 추모만큼이나 필요한 게 정치다. 정치적 허구 가운데서 진실을 탐구하는 것, 그게 바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이다. 문학적 상상력도, 입체적 해석도 일차적 진실이 있어야 가능하다. 지금은 복종이 아니라 진실 구현을 위한 질문이 필요한 때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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