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쌓아올린 ‘마의 3000벽’, 윤석열이 무너뜨린다
(시사저널=공성윤 기자)
의과대학 정원 3058명. 김대중 정부의 의약분업 이후 16년째 꿈쩍도 하지 않는 숫자다. 이 철옹성 같은 숫자에 윤석열 대통령이 매스를 들이댔다. 역대 정권마다 제안했지만 의료계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된 의대 정원 확대를 윤석열 정부가 공식화했다. 이번만큼은 정치권과 여론이 뜻을 모아 힘을 실어주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남은 벽은 의료계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대화의 뜻을 밝혔지만 반대 의사를 굽히지는 않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의 방법과 공공의료 발전을 위한 후속 조치도 숙제다.
교육부와 보건복지부는 의대 정원 확대를 위해 10월26일부터 각 대학의 수요 역량을 조사하기로 했다. 이를 토대로 2025학년도 의대 정원을 결정할 방침이다. 학기 일정을 감안하면 대학별 정원은 내년 상반기에 발표된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 같은 계획을 10월26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발표했다. 이날 바로 정원 확대폭을 결정지을 것이란 관측도 나왔지만, 의협과의 대화를 앞두고 선제 자극하지 않겠다는 전략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날 오후 의협과의 제15차 의료현안협의체 회의를 연다. 의료현안협의체는 지난 2020년 9월 문재인 정부와 의협이 의정합의를 맺을 때 의대 정원 조정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 만든 기구다. 코로나19 사태로 출범한 지 2년여가 지난 올 1월에야 첫 회의를 갖고 지금까지 14차례 만났다. 그러나 줄곧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바뀐 건 윤석열 대통령이 "계속 주판알 두드리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10월19일 의료혁신 전략회의)며 의대 정원 확대 의지를 내비친 뒤다. 의료현안협의체 개최 일자도 당초 11월2일이었으나 일주일 앞당겨졌다.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은 10월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의대 정원 확대 동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야당도 화답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0월23일 최고위원회에서 "여야가 힘을 합쳐 성과를 내는 첫 사례로 의대 정원 확대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민 10명 중 7~8명이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속속 나왔다.
의대 신설에 年 300억...지역갈등도 문제
관건은 '어떻게 늘릴 것인가'이다. 당장 거론되는 건 의대 신설이다. 다만 이는 전적으로 지방대학의 요구가 집중 반영된 대책이라는 점에서 지역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비교적 강경한 의대 유치 의사를 보이는 곳은 전남권이다. 전남은 전국에서 세종시를 제외하고 의대가 없는 유일한 지역이다. 전남을 지역구로 둔 민주당 소속 김원이·소병철 의원은 10월18일 전남 의대 신설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벌였다.
경남권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남도는 10월24일 "'인구 100만 도시 중 유일하게 의대가 없는 창원에 정원 100명 규모의 의대를 신설해달라'는 뜻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경북에서도 포항 포스텍을 중심으로 의대 유치를 위한 시민위원회 구성을 준비 중이다. 경북은 2020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의사 수가 126.5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낮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의대 신설을 결정하면 지역갈등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결정적인 장애물은 돈이다. 시사저널이 21대 국회에 발의된 '의과대학 설치 특별법안' 11건 중 비용추계안이 게재된 8건을 분석해본 결과, 의대 한 곳을 짓는 데 연 평균 305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됐다. 가장 많은 비용을 써낸 안건은 경남 창원대 의대 신설안이다.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발의한 해당 안건에 따르면, 창원대 의대를 신설하는데 연 평균 458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조사됐다. 운영비, 등록금, 기숙사비 등 추가 재정까지 합하면 8년 간 총 3666억원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의대 신설 여부에 대해 10월26일 발표에서 "지속 검토할 계획"이라고만 했다.
"산불 났는데 나무 심자는 격"
조 장관은 대신 "의사인력 확충의 시급성을 감안해 기존 대학을 중심으로 증원을 우선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전국에서 의대 정원이 가장 낮은 제주(40명)와 울산(40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조 장관은 최근 국회 감사에서 "최소 의대 입학정원이 80명은 돼야 한다는 얘기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전했다. 혹은 인구 10만 명당 의사 수가 최하위권인 경북과 충남(137.5명)도 유력 후보로 떠오른다.
물론 이때도 돈은 들어간다. 의협의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의대생 1명을 전문의까지 양성하는 비용은 총 8억6700만원으로 추계됐다. 100명만 늘려도 800억원이 훌쩍 넘어간다. 더군다나 수백억원을 써서 의대생을 받는다 해도 국민들의 당장 그 변화를 체감하기는 힘들다. 의대생이 현장에 투입되기까지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 김이연 의협 대변인은 시사저널에 "의대 정원 확대는 나랏돈을 담보로 한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했다.
의협은 의료복지 증진이란 궁극적 목표를 놓고 봤을 때 의대 정원만 늘리는 건 소용없다고 지적한다. 이는 정치권과 시민단체도 공감하는 대목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의대 정원 확대를 주장하면서도 "필요한 곳에 의사를 배치할 방안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사를 여럿 뽑아도 지역의료, 필수의료 등 공공 분야에 투입되지 않으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사태의 해결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비서실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을 지낸 박기영 순천대 생물학과 교수는 시사저널에 "광주권 의대 졸업생 중 전남에서 진료활동을 하는 비율은 약 20%에 불과하다"며 "거의 대부분이 수도권의 민간 대형병원으로 이동한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주장했다. 주수호 전 의협 회장은 10월25일 페이스북에 "의사 수 늘려 낙수효과를 보자는 게 몰락하는 필수의료의 대책이라는 건 산불이 나서 나무가 타는 데 불 끌 생각은 안하고 나무를 더 심자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a'는? "의료면허 지역별 발급" 제안도
그래도 의료인력 배분의 문제는 일단 많이 뽑은 다음에 고민해도 되지 않을까. 의협은 여전히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이연 의협 대변인은 "국가 예산을 필수의료 수가 인상에 쓰면 의료 공백이 메워지면서 자연스레 문제가 해결될 텐데 정부는 의대 정원에만 집중하고 있다"며 "의사 증원은 제일 간단하면서도 수치로 바로 나타나는 정책이기 때문에 표심 모으기에 유리하다는 걸 정부도 알 것"이라고 비판했다.
의료 개혁을 외쳤다가 한발 물러섰던 문재인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와 함께 공공의대 신설, 지역의사제 등을 제시한 바 있다. 이러한 대책은 의사의 지역 근무를 의무화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박기영 교수는 "미국 변호사가 특정 주(州)에서만 근무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 의사 면허도 공공성 차원에서 지역별로 발급해 그 지역에서만 일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다만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는 건 걸림돌이다.
◎ 의약분업의 나비효과...의대 정원 둘러싼 갈등의 역사
김대중 정부가 초래하고 문재인 정부가 회복 실패한 의대 정원 문제 이어받은 윤석열 정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지금은 너무 당연시되는 이 말은 사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니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은 진료뿐만 아니라 약을 제조해 나눠주는 역할까지 맡았다. 대형 병원이 아니라 동네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또 약국은 병원의 처방전 없이도 전문의약품을 팔았다. 이러한 관행은 크고 작은 문제를 꾸준히 일으켰다. 의사와 약사가 지나친 수익을 노리고 과도하게 약을 처방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98년 의약분업 시행 계획을 밝혔고, 이후 약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2000년 7월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 주요 당사자인 의료계가 전면 파업에 돌입하며 강경 투쟁에 나선 것이다. 결국 정부는 '의대 정원 10% 감축' 등을 카드로 꺼내며 의료계를 달랬다. 이후 의대 정원은 2007년까지 총 351명 감소해 3058명으로 굳어졌고, 이 수치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의협은 의약분업에 대해 국내 최초의 의료계 파업이자 "가장 규모가 컸던 단체행동"이라고 평가한다. (2018년 9월 《국내・외 의사 단체행동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 이때 정부가 당근으로 내놓은 의대 정원 감축은 의료계와의 기나긴 갈등의 씨앗이 됐다.
의대 정원이 줄어든 지 5년 만인 2012년 8월, 의대 정원 복구 계획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경실련이 당시 민주통합당 의원들과 '공공의사 확충 방안'을 주제로 가진 토론회가 그 발단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취지의 보건복지부 연구 결과도 공개됐다. 언론이 군불을 때며 정부 차원의 움직임을 예고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선을 그었다. 의료계도 선제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서 찻잔 속 미풍으로 그쳤다.
하지만 이듬해 박근혜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 방안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2013년 11월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민경제자문회의는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이와 관련해 이렇다 할 계획의 구체적 방향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의료계와의 갈등은 다시 불거졌다. 정부의 원격의료·영리병원 도입 정책이 화근이었다. 집단휴진에 돌입한 의협은 당시 노환규 의협회장이 자해 소동까지 벌이며 강경 투쟁에 나섰다. 결국 정부는 한발 물러섰다. 자연스레 의대 정원 확대 얘기도 묻혀버렸다.
잠잠하던 의료계는 2020년 문재인 정부의 '역대급'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다시 폭발했다. 당시 정부는 매년 400명씩 10년 간 4000명의 의사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의사 감축이 시작되기 이전보다 더 큰 규모다. 의협은 총파업으로 맞섰고 전공의까지 가세하며 규모가 커졌다. 결국 정부는 "협의체를 통해 원점부터 재논의하자"고 의협에 제안했고, 이에 따라 의료현안협의체가 만들어졌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은 전 정부부터 타이머가 가동된 시한폭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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