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어른 윤계상, 새로운 '나의 아저씨'의 탄생('유괴의 날')
[엔터미디어=정덕현] "아저씨가 절 유괴한 시간은 제게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었어요." 이토록 슬픈 이야기가 있을까. ENA 수목드라마 <유괴의 날> 마지막 회에서 명준(윤계상)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로희(유나)는 그런 말로 명준을 변호했다. 그는 재판정에 유괴란 무엇인가를 되물으며, 오히려 명준에게 유괴됐던 바로 그 이전까지의 삶이 진짜 '유괴된 삶'이었다고 토로했다. 사실상 명준은 끝까지 로희의 진정한 보호자 역할을 해줬기 때문이다.
<유괴의 날>은 사실상 로희라는 아이의 목소리를 빌어, 엇나간 욕망으로 심지어 아이까지 이용하는 어른들 세상에 가하는 일침이었다. 마지막 회에 로희가 중심이 되어 형사들을 진두지휘해 살인사건의 진범인 서혜은(김신록)을 검거하고, 명준의 변호에 앞장서면서 그의 딸 희애(최은우)까지 모두 챙기는 모습은 그래서 판타지가 더해져 있었지만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아이가 어른들을 꾸짖는 듯한 목소리가 로희의 말과 행동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11살 소녀 로희의 진면목이 드러나던 순간은 시청자 모두를 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죗값을 받기 위해 경찰에 자수를 결심하는 명준을 로희가 끝까지 붙잡으며 했던 말이 그것이다. "나 이런 말하기 진짜 싫은데. 난 아저씨랑 같이 있는 게 너무 좋단 말이야. 나한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람이랑 내가 배고픈지 졸린 지 심심한지 그런 관심 주는 사람이랑 나 처음 있어 봤단 말이야. 가지마."
실험에 의해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게 됐다는 이유로 로희가 만나게 된 어른들의 세상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겨우 11살 아이에게 많은 걸 기대하고 바라면서도 정작 이 아이가 배고픈지 졸린 지 심심한지 따위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세상. 그런 약삭빠르고 계산적인 세상 앞에서 마치 바보처럼 보였던 명준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로희가 만난 거의 유일한 진정한 어른이었다. 마치 새로운 의미로서의 '나의 아저씨'의 탄생이랄까.
<유괴의 날>이 특별했던 건, 유괴라는 범죄의 소재를 가져와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를 그려나가면서, 그 이면에 깔려있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엘리트주의를 꼬집는 사회극적 요소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명준과 로희 그리고 상윤(박성훈) 같은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휴먼드라마적 감동까지 더해줬다는 점이다. 범죄스릴러 장르를 통해 이토록 다양한 장르적 묘미를 한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대본이 좋았지만 그래서 그 위에 얹어진 연기자들의 호연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거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선한 어른의 모습을 연기한 윤계상을 중심으로,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연기를 선보인 유나, 파양된 과거 상처로 인해 그 상처 입은 아이로부터 한 치도 성장하지 못한 어른의 모습을 때론 섬뜩한 변신으로 연기해낸 김신록,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정의의 길을 가는 형사의 든든함을 보여준 박성훈, 발달이 늦은 아이의 엄마로서 로희를 이용하는 연구에 동참하지만 로희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엄마로서의 면면이 슬쩍 튀어나오는 복합적인 연기를 선보인 서재희, 강렬한 악역으로 극적 긴장감을 높인 강영석 등등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빛이 났다.
이제 장르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요즘, 그 장르들을 변주해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낸 <유괴의 날>은 K콘텐츠의 확장과 진화라는 관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결국 유괴라는 소재를 가져왔지만 그 유괴의 날이 아이에게는 '자유의 날'이 되었다는 아이러니를 범죄스릴러 장르를 변주해 완성했기 때문이다. <유괴의 날>은 이제 장르물의 공식들이 모두 시청자들에게 읽히고 있는 시점에, 기분 좋은 뒤통수를 오랜만에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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