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시대의 비극…유엔·WTO·WB 줄줄이 '무용론'

김정남 2023. 10. 2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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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팔 전쟁서 또 무기력한 안보리
미·유럽 vs 중·러 극한 대립 '비극'
WTO, WB, IMF 등서도 갈등 격화

[이데일리 김정남 기자] 유엔 안보리는 중동 분쟁 앞에서 또 무기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간 확전을 막고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결의안마저 채택하지 못한 채 공회전했다. 수천명이 사망하는 전쟁이 현실화하는데 세계 평화의 최후 보루인 안보리가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엔뿐만 아니라 진영간 대립이 격화하는 극단의 시대 들어 ‘주요 국제기구들이 굳이 필요한가’ 하는 무용론이 고개를 드는 분위기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유엔본부. (사진=AFP 제공)

이-팔 전쟁 앞에 무력한 안보리

유엔 안보리는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 중동 상황을 의제로 공식 회의를 열고 각종 결의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한 건도 채택하지 못했다.

미국이 먼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한 군사 행위 일시중지(humanitarian pause)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 초안을 제출하고, 이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이번 결의안은 하마스와 다른 테러 집단의 극악무도한 공격을 명백히 규탄한다”며 “또 인도주의적 접근이 신속하고 안전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군사 행위의 일시 중지를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낸 제출안은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10개국의 찬성을 얻었다. 안보리 15개 이사국 중 9개국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요건을 충족했다. 그러나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결국 부결됐다. 결의안이 처리하려면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5개 상임이사국 모두 찬성해야 한다. 바실리 네벤자 주유엔 러시아 대사는 “미국 제출안은 극도로 정치화하고 모호한 것”이라며 “이런 초안을 밀어붙여 거부권 사용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을 무마하고자 한다”고 했다. 모든 사안을 미국 주도로 끌고 가려 하는데 대한 지적으로 읽힌다.

러시아 역시 인도주의적 접근을 위해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휴전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냈지만, 이번에는 미국과 영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부결됐다. 찬성국은 4개국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하는 미국 등 서방 진영은 가자지구를 겨냥한 공습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단지 구호품 공급을 위한 일시적인 전투 중단을 결의안에 담았다. 반면 러시아는 장기적인 중단을 뜻하는 휴전에 힘을 실었다. 이 미묘한 차이를 두고 자유주의 진영과 권위주의 진영간 의견이 엇갈린 셈이다. 이미 수천명이 목숨을 잃은 와중에 추가 희생자가 쏟아질 게 뻔한 데도, 세계 평화 수호를 위해 존재하는 안보리가 아예 마비 상태에 빠진 것이다.

미·유럽 vs 중·러 대립 ‘비극’

안보리 무용론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계속 이어지는 북핵 위기 등을 두고 실속 없는 논쟁만 반복하고 있는 탓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엔 변화의 필요성에 동의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원국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다”며 “세상은 변했는데 유엔은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꼬집었다. 미국이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 카드를 꺼내는 등 각 회원국 나름의 노력이 없지는 않지만, 그마저도 진영간 대립으로 비화하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극단의 시대’ 들어 무용론에 부닥친 곳은 유엔뿐만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대표적이다. 무역 자유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 경제의 단일 블록을 추구하고자 하는 WTO는 이미 껍데기만 남을 정도로 유명무실해졌다. 미국이 중국의 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두고 불공정 관행이라고 규정하면서, 미중 대결의 장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WTO 개도국은 관세, 수출 등에서 150여개에 이르는 우대 조항을 인정 받는다.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최근 “경제 대국이 빈곤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제도를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WTO 개혁을 주장했지만, 이에 맞서 중국 측은 “중국의 권익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미국이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것도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다분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를 두고 “WB, IMF와 같은 다자 기관들이 새로 거듭날지, 아니면 미중 경쟁 속에 더 주변부로 전락할지 등 미국 주도 질서의 미래를 가르는 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정남 (jungkim@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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