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차계약·세입자 동의서까지 위조해 190가구 굴린 임대인
"전세금이 최우선변제금 이하다"…허위서류로 보증보험 미가입
허술한 정부·지자체 단속에 '다주택 임대인' 세입자만 피해
(세종=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오피스텔 9개 동 190가구를 보유하면서 지방자치단체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임대차계약 관련 허위 서류를 제출해 세제 등 각종 혜택은 챙기면서도 보증보험 가입 의무는 피해 간 개인 임대사업자의 행태가 드러났다.
주택 수십, 수백채를 보유한 개인 임대사업자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느슨한 관리·감독이 제2, 제3의 '빌라왕'을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입자들은 126억원에 달하는 전세금을 떼일 위기에 놓였다.
부채비율 속여 99가구 보증보험 취소
26일 국토교통부와 HUG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정의당 심상정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HUG는 지난 8월 임대사업자 A씨가 소유한 부산 오피스텔 9개 동에 발급된 임대보증금 반환 보증보험 152억원(126가구) 중 126억원(99가구)을 일괄 취소했다.
A씨가 임대사업자의 의무인 임대 보증보험 가입을 신청하면서 일부 세대 전세금을 계약금보다 낮은 수치로 바꾼 허위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증보험 가입 요건인 부채비율(주택담보대출 등 담보권 설정액과 전세금을 합한 금액을 집값으로 나눈 수치)을 100% 미만으로 맞추기 위해서였다.
HUG가 이를 뒤늦게 발견하고 보증을 취소한 것이다.
A씨는 일부 주택의 전세금을 속였지만, A씨 소유 오피스텔 건물 9개 동 중 8개 동이 공동 담보로 묶여 있어 공동 담보 건물 전체의 부채 비율이 올라갔고, 정상 계약까지 보증이 취소됐다.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99가구 보증 취소' 사태를 계기로 A씨가 보유한 등록임대주택 190가구의 임대차계약 신고 내용을 확인해 봤더니 A씨는 허위 서류로 보증보험 가입 의무 또한 회피하고 있었다. 보증보험 가입 회피를 위해 세입자 사인까지 위조했다.
지자체·HUG에 모두 '허위 신고'
A씨가 보유한 부산 수영구 B오피스텔(16가구) 건물의 임대차계약 신고 내역과 임차인 등으로부터 확보한 실제 임대차 내역을 비교한 결과, 사실과 동일하게 계약 기간을 신고하고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대는 5가구뿐이었다.
이 건물 201호의 경우 전세보증금이 실제로는 1억5천만원이고, 세입자는 2020년 11월 맺은 전세 계약을 2년 뒤 연장했다.
그러나 지자체에는 재계약을 신고하지 않았고, HUG에는 전세금이 최우선변제금 이하(최초 계약 시점 기준으로 2천만원)라 보증보험 의무 가입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허위 서류를 제출했다.
이 오피스텔 202호도 실제 보증금은 1억2천만원이지만, 임대인 A씨는 보증금이 최우선변제금인 2천만원 이하라는 허위 계약서를 꾸며 냈다. 지자체에는 임대차 계약 신고도 하지 않았다.
임대사업자는 세입자가 있다면 등록 3개월 이내에 임대주택 소재지 지자체에 임대차계약 최초 신고를 하고, 임대차계약 변경 때마다 변경 신고를 할 의무가 있다. 묵시적 계약 갱신 때도 신고해야 한다. 신고를 안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와 함께 신규 임대사업자에게는 2020년 8월, 기존 사업자에겐 2021년 8월부터 임대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화됐다.
다만 보증금이 최우선변제금 이하이고, 이에 따라 임대 보증보험에 미가입한다는 세입자 동의서를 받으면 가입이 면제된다.
A씨는 전세금이 최우선변제금 이하라고 허위 신고한 것은 물론, 보증보험 가입 면제에 필요한 임차인 동의서까지 위조해 제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A씨 보유 수영구 B오피스텔의 경우 16가구 모두 임대사업자에 대한 보증보험 가입 의무가 부여된 이후 임대차 계약 및 재계약이 이뤄졌고, 실제 보증금은 8천만∼1억5천만원이라 전 세대가 보증보험에 가입됐어야 한다.
그러나 11가구는 보증보험 가입이 안 됐고, 가입된 5가구마저 허위 서류가 들통나며 보증을 취소당했다.
"보증보험 미가입 동의"…임차인 동의서도 위조
A씨가 보유한 부산 C오피스텔 건물도 비슷한 상황이다.
총 30가구 중 월세 2가구를 뺀 28가구에 대한 보증보험에 가입해야 하지만, 실제 가입한 것은 21가구였다. 이마저도 보증이 취소돼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A씨는 나머지 7가구에 대해선 보증금이 최우선변제금 이하라는 허위 계약서와 임대인 동의서를 꾸몄다.
이 오피스텔의 피해 세입자는 "전세금이 2천만원 이하라 보증보험에 미가입해도 된다는 동의서를 작성한 적이 없다"고 했지만, 그가 동의한 것으로 적힌 서류가 떡하니 제출돼 있었다.
이 건물 역시 지자체에 신고한 임대차계약 기간과 실제 계약 기간이 일치하는 경우는 10가구뿐이었다. 지자체에 아예 신고하지 않은 임대차 계약도 7건 있었다.
오피스텔 9개 동을 보유한 A씨가 B오피스텔에서 챙긴 보증금만 20억7천750만원, C오피스텔은 41억3천500만원이다.
전세 피해가구 조사했더니…"동록임대주택 7.7%만 보증 가입"
의무를 제대로 지키는 임대사업자들도 많지만, A씨 사례를 보면 정부와 지자체가 다주택 임대사업자의 임대차 계약 신고 의무, 보증보험 가입 의무를 관리·감독하는 데 손을 놓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도시연구소가 올해 8월 24일부터 9월 17일까지 전세 피해 1천579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민간임대주택으로 등록된 피해 주택(483가구)의 단 7.7%만 보증보험에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가입 임대인에 대한 지자체 관리가 허술하다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수치다.
단속과 제재가 뜸하다 보니 미가입 사례가 속출하고, 허위 서류를 제출하는 일까지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시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국가와 지자체의 관리 감독 소홀로 발생하는 문제가 깡통전세,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대사업자가 보증보험 가입 의무를 어겨 지자체가 과태료를 부과한 건수는 작년 한 해 전국에서 37건에 불과했다.
민간임대주택특별법 개정에 따라 이달 2일부터는 임차인이 거주 중인 주택의 경우 임대사업자가 보증보험에 가입해야만 임대주택 등록을 허용한다. 주택이 공실이라면 민간임대주택 등록 후 보증보험에 가입하도록 했다.
미가입 때는 지자체가 임차인에게 미가입 사실을 문자 메시지로 통보해 임차인이 계약을 해지하고 위약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임대인이 세입자에게 '보증보험에 가입하겠다'고 말로만 약속해놓고, 실제로는 가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뤄진 규제 강화 조치지만, 이 역시 지자체의 관리가 뒤따라야 실효성 있는 조치가 될 수 있다.
심상정 의원은 "정부가 임대사업자에게 여러 혜택을 주면서 몇 개의 의무를 부여했는데, 이 의무를 제대로 지키는지 관리·감독하지 않아 전세 사기꾼을 합법적으로 키워준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지자체와 HUG는 임대인 제출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해 허위가 아닌지, 전세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이 있는지 검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 부산 A오피스텔 피해 상황
※ 자료 출처 : 국토교통부, 주택도시보증공사, 임차인 계약서류 취합, 정의당 심상정 의원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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