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칼럼] 일본 과학의 추락, 남 일이 아니다
R&D 투자 경쟁국에 밀리고, 수익 업무에 연구시간도 감소
해마다 10월이면 전 세계가 노벨상에 주목한다. 혹시나 했지만 올해도 한국인 수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노벨 과학상 수상자 25명을 배출했다. 한국은 이웃 일본에 축구, 야구는 이겼지만, 노벨 과학상은 25 대 0으로 완패했다.
그런 일본 과학이 추락하고 있다. 경쟁국이 말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스스로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MEXT)에 따르면 일본은 연구자 수에서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이지만, 20년 전과 같은 수준의 연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문부과학성이 지난 25일 공개한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NISTEP)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과학논문 발표 건수는 일본이 7만775편으로, 중국과 미국, 인도, 독일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인용된 상위 10% 논문은 3767편으로 일본이 지난해보다 한 계단 하락한 13위를 기록했다. 상위 10% 논문 수는 중국이 5만4405편으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이 3만6208편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일본은 2000년에는 상위 10% 논문 수가 세계 4위였다. 2005년까지만 해도 순위를 유지했지만, 그 뒤로 곤두박질하면서 13위까지 떨어졌다. 일본 과학이 양만 앞서고 질적으로 퇴보했다는 말이다. 문부과학성이 분석한 추락 원인은 간단하다. 연구개발(R&D) 투자가 주춤하는 사이 연구자들이 본업인 연구보다 행정과 기관 수익 업무에 시간을 뺏겼다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술정책연구소 과학기술예측센터 소장인 아가미 마사츠라(Masatsura Igami)는 이날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인터뷰에서 연구비 투자 감소가 질적 하락의 한 원인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대학의 연구비 지출은 미국과 독일에서 약 80%, 프랑스는 40% 증가했다. 한국은 4배, 중국은 10배 이상 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10% 증가에 그쳤다. 일본이 R&D 투자에 주춤하는 사이, 경쟁국들이 연구비를 늘리면서 추월한 것이다.
연구 환경도 과학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아가미 소장은 일본 과학자들이 실제 연구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연구비를 더 받아도 영향력 있는 연구를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문부과학성의 2020년 분석에 따르면 2002년과 2018년 사이 일본 대학 연구자들이 연구에 전념하는 시간의 비율이 47%에서 33%로 감소했다. 대학교수는 행정과 교육 업무에 실험 지원까지 도맡고 있고, 의학 연구자는 병원 수익을 위해 연구보다 환자 진료에 더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 기간 과학논문 수에서 세계 8위를 기록했다. 상위 10% 논문 수는 10위이다. 2020년 14위에서 꾸준히 상승세를 보였다. 무엇보다 일본과 달리 R&D 투자를 크게 늘린 덕분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일본의 현재는 한국의 내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R&D 예산 효율화를 내걸고 내년 예산을 5조2000억원(16.6%)이나 삭감했다. 정부가 과학 연구비를 줄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장 연구 현장에서는 국제 공동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장비 구매를 포기하고 있다. 안 그래도 학령 인구 감소로 대학원생이 줄고 있는데 과학자의 미래마저 불투명해지자 학생들이 발길을 돌리고 있다. 이공계 우수 인력의 의대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실험을 돕는 테크니션 같은 연구지원 인력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것은 배부른 소리이다. 일본처럼 연구비와 연구 시간이 동반 감소하는 악순환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부의 진단대로 연구비 수주 과정에서 비리가 있다는 것은 과학계에 공공연한 비밀이다. 코로나19 대유행이나 일본발 기술 무역장벽 같은 외부 충격에 제대로 된 심사 없이 무작정 예산을 늘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는 일은 막아야 한다. 정부가 말한 연구비 카르텔이 있다면 찾아 없애고, 과제 평가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과학자들이 스스로 해야 한다. 밖에서 보기에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으면 그때부터 학계에서 쭉 군림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노벨상은 어디까지나 젊을 때 연구성과를 인정받은 것일 뿐이다. 지금 하는 연구는 다른 연구자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동료 평가(peer review)’를 받는다. 연구 과제 평가 개혁도 논문 평가처럼 과학자들의 자율로 진행해야 정당성과 권위를 인정받을 것이다. 정부는 세수(稅收)가 부족하니 과학계도 고통 분담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해야지, 카르텔 운운하며 예산 갉아먹는 비리 집단으로 모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19세기 과학자인 영국의 마이클 패러데이는 대중 과학강연 후 어느 귀부인이 도대체 이런 연구가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힐난하자 “갓난아기는 무슨 쓸모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올해 노벨 과학상은 코로나바이러스의 공포로부터 인류를 해방한 백신 개발자와 자연의 색을 구현한 양자점발광다이오드(QLED), 찰나를 포착해 양자컴퓨터의 기반을 닦은 아토초 레이저 개발자들에게 돌아갔다. 최근 노벨 과학상은 이처럼 기초과학 연구에서 시작해 나중에 인류에게 엄청난 실용적 가치를 창출한 연구들에 돌아가고 있다. 자라서 미래 세대를 구하고 먹여 살릴 갓난아기가 버려지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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