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데이터 준비수준 걱정스러워…공구함에 녹슨 못 쌓아두면 뭐하나"
김범 엔코아 CTO(최고기술책임자)
"데이터 관리와 활용은 단번에 되지 않는 만큼 최고경영자의 관심과 의지가 필요하고 기업문화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업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인텔리전스의 출발은 바로 전사를 관통하는 '데이터 리터러시'입니다."
김범 엔코아 CTO(최고기술책임자) 겸 전략사업본부장은 "기업이 ESG 경영을 얼마나 열심히 하든지 활동을 인정받고 평가받기 위해 결국 내놔야 하는 게 데이터"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김 CTO는 IT솔루션 업계에서 30년간 활동한 데이터·소프트웨어 전문가다. 데이터 컨설팅·솔루션 기업 엔코아 사업 전반의 기술로드맵을 제시하고 데이터 통합관리 플랫폼과 솔루션 연구개발을 총괄하고 있다. 그에 앞서 대학과 대학원에서 전자계산학과 데이터베이스를 전공하고, 산업 현장에서 SW 개발자와 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97년 창업 후 국내 데이터 산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엔코아는 최근 SK네트웍스에 인수돼 보다 안정적 기반 위에서 데이터·AI(인공지능) 사업을 펼치게 됐다. 엔코아는 통신, 금융, 모빌리티 등 산업에서 500여개 고객을 확보하고 있으며 데이터 모델링, 메타데이터, 품질관리 등 솔루션을 공급하고 있다.
김 CTO는 데이터의 기초부터 닦지 않은 국내 기업들이 DX(디지털전환), AI, ESG 같은 화두가 떨어질 때마다 급하게 달려들어서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일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데이터가 어디에 있는지, 누가 갖고 있는지, 믿을 만한 데이터인지 같은 기본적인 일을 다지지 않은 상태에서 활용부터 하려다가 그게 아님을 깨닫고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
그는 ESG 경영과 관련해 "현재 대부분의 기업은 고객·정부·평가기관·투자기관 등 이해 관계자들이 ESG 데이터를 요청하면 수작업으로 수집·분석해 제공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비효율적인 환경이다. 문제는 이런 비효율이 바로 큰 리스크로 이어진다는 점"이라며 "ESG 공시가 의무화됐을 때 데이터에 오류가 있으면 페널티가 부과될 것인 만큼 데이터를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반과 조직, 프로세스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데이터를 쌓는 것은 공구함 안에 녹슨 못을 이것저것 담아두는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관리 되지 않은 데이터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가장 우선 필요한 게 데이터 거버넌스입니다. 조직 내에서 누가 뭘 할지 역할부터 명확하게 구분해야 해요. 그 위에서 품질도 높이고 프로세스와 전략, 기반도 갖춰질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업들이 의사결정을 자동화하고 정확도를 높이는 한편 사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하는 DX 활동 데이터 확보와 유사하다. ESG가 외부 평가와 규제 대응을 위해 데이터를 고품질로 제공하는 것이라면, DX는 기업 본연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내·외부 데이터를 분석해 활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김 CTO는 "기업들의 상황은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저품질 데이터를 가지고 노심초사하는데, DX나 AI 대응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과 너무나도 똑같다. 허약한 데이터 기초체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기업들조차 데이터 관리 수준이 여전히 미흡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어 "최근 DX와 AI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 기업 내에 흩어진 데이터를 한 곳에 모아 '데이터레이크'를 구성했는데, 막상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들이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민낯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업들이 가진 데이터의 품질이 확보되지 않으면 분석 결과가 오락가락하고 신뢰성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DX든 ESG든 결국 필요한 데이터를 빨리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데이터가 고품질이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DX도 ESG도 못 한다"고 했다.
그는 "ESG 대응 과정에서 DX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결국 ESG도 핵심은 조직의 '데이터 리터러시'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구성원이 데이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기반이 없으면 DX도 ESG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ESG 경영에 대응하려면 기업 경영활동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체계가 필수다. 그동안은 생산부서는 생산 자동화, 영업조직은 영업예측, 인사부서는 인사시스템 등 각 부서에서 제각각 DX 활동을 하다 보니 데이터도 각각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ESG 경영을 하려면 제조부터 공급망관리, 인사, 노무까지 모든 데이터를 봐야 하고, 이를 위해선 모든 부서가 관여해야 한다. 김 CTO는 "특정 업무부서나 IT 담당자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과 이해관계자가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활용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과거에는 데이터를 IT 조직이 관리하면 됐지만 그게 아니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김 CTO에 따르면 글로벌에서 사업을 하는 국내 기업들은 ESG에 맞는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ESG 관련 데이터를 담는 그릇을 만들고 관련 데이터를 계속 담는 체계를 만들고 있다. ESG 관련 기업활동 전반의 내용을 지표로 삼는데, 탄소배출량 관리뿐 아니라 여성 임원 비율, 기업문화, 지배구조 등의 내용도 포함된다. 이익, 매출, 자산, 현금흐름 등 주로 재무적 지표를 관리하던 것에서 기업이 축적하고 관리하는 데이터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 것.
김 CTO는 "기업에 축적되는 ESG 관련 원천 데이터는 계속 변할 수밖에 없다. 그 내용이 맞느냐 아니냐, 통제됐느냐 아니냐를 보고 시스템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린워싱' 이슈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정 데이터가 있는지, 관련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는지 등을 찾아보는 기반을 갖추고, 찾아낸 데이터를 확보하는 프로세스가 있어야 한다. 이런 ESG 데이터의 차림표 역할을 하는 카탈로그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백화점에서 키 150㎝ 아이에게 청바지를 사려 하는데, 제품이 종류별로 분류돼 있지 않고 양복부터 여성복, 아동복이 매대에 다 섞여서 쌓여 있는 꼴입니다. 그 속에서 찾는 제품을 찾으려면 쌓인 물건 더미를 다 뒤져봐야 하죠. 점원은 제품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매번 손님이 주문을 할 때마다 허겁지겁 달려가는 상황이죠."
이 과정에서 품질은 기본이다. 데이터 품질이 확보되지 않으면 다시 악순환의 시작이다. 금융산업은 비교적 통계 기반이 잘 돼 있는데 제조기업들은 데이터 기반 경영보다는 양산 중심의 경영을 해 오다 보니 미흡한 부분이 있다.
김 CTO는 "많은 제조기업들이 데이터 활용과 품질 확보는 커녕 식별조차 제대로 못한다. 데이터를 가져와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제조현장에서 나온 소리 데이터가 있는데, 바퀴에서 나온 건지, 다른 소음 데이터인지 모르는 것이다. 볼트 하나, 원재료 하나조차 어디에 쓰는 것인지 그것을 산 사람만 안다. 제조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만 아는 것이다. ESG 경영을 하려면 전사 데이터를 모으고 관리하면서 대응해야 하는데 영역별로, 부서별로 데이터가 흩어져 있는 사일로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제조기업들은 SCM(공급망관리), MES(제조실행시스템), ERP(전사자원관리) 등 시스템에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하는 작업도 시급하다. 기업들은 이제 그 작업을 하려 한다. ESG 데이터 플랫폼의 첫발을 떼는 수준인 것. 데이터의 사각지대였던 제조현장이 바뀌는 큰 흐름이 이제 막 시작됐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반도체, 배터리, 가전, 통신, 디스플레이, 화장품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은 모두 데이터 활용·분석 프로젝트를 상시적으로 구동하고 있다. 데이터를 자산화하고 표준화해서 카탈로그 형태로 만들어 AI, ESG, 의사결정 등 용도별로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수시로 분석하는 체계를 가동하는 게 지향점이다. 국내 대표적인 한 제조기업은 수년간 데이터 거버넌스, 통합, 분석, 검색시스템 구축·운영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필요한 데이터를 원할 때 얻어서 활용하는 게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국내 대형 기업은 빅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해서 의사결정과 AI, ESG에 활용하고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한 가전기업은 데이터 관리체계와 품질 고도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한 배터리 기업은 데이터 아키텍처 표준화와 관리시스템 구축, 표준화, 데이터포털 구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기업 경영에 핵심인 ERP는 전사 관리를 위한 시스템이지만 한정된 데이터만 다루는데, ESG와 AI 시대에는 훨씬 다양한 데이터를 찾고 결합시켜 활용해야 한다.
김 CTO는 그 과정에서 데이터 식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누가 생성했는지, 관리주체와 소유주는 누구인지, 민감정보여서 보호할 대상인지, 데이터의 단위와 의미가 뭔지. 데이터는 어디에 저장돼 있고 어디에 쓰고 있고 왜 저장하고 있고 언제까지 유효한지를 파악해야 어디에 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를 의미하는 메타데이터 정의와 관리를 제대로 하는 게 필수다.
김 CTO는 "기업의 데이터 분석가들은 데이터 분석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현실은 식별 불가능하고 품질이 떨어지는 데이터와 씨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실제로 들이는 시간의 80~90%를 데이터를 찾고 쓸 만하게 사전처리하는 데 쓴다. 데이터가 준비 안되면 ESG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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