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후회없이 살았어”···멕시코 한인의 여정 ‘백년 여행기’

이영경 기자 2023. 10. 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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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초상>에 등장하는 마리아 에우헤니아 올센 아길라르. 2023. 2채널 HD 비디오, LED 스크린, 컬러, 22분, 500×350 cm (2). 영상 스틸. 작가 소장.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의 4채널 영상 설치 작품 ‘백년 여행기’의 모습. 한국의 판소리, 멕시코의 마리아치, 일본의 기다유 공연과 작가가 촬영한 영상과 함께 멕시코에서 자라는 선인장들이 설치돼 있다.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튀기라 차별 받으며 7번 결혼
이민2세 마리아 할머니의 삶 등
멕시코 한인의 과거와 현재
영상과 설치작업으로 입체적 전달

정연두의 ‘백년 여행기’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전시다.

100년의 시간을 통과한 것 같기도, 멕시코와 한국의 먼 거리를 오간 것 같기도 하다. 100년 전 멕시코의 낯선 땅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한인들의 여정과, 그들의 흔적을 좇는 작가의 여정을 함께한 느낌이 든다. 100년의 시간과 멕시코까지의 먼 거리를 거쳐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기묘한 여행과도 같다.

‘백년 여행기’는 1905년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했던 118년 전 한인들의 이주와 후손들의 현재를 다룬다. 정연두는 3차례 멕시코를 찾아 그들이 고된 노동을 했던 농장을 방문하고 후손들을 만났다. 그 이야기를 마임이스트의 공연, 사진, 영상, 설치미술 등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시작은 백년초 선인장이었다. 지난해 제주도에 머물며 백년초 자생지 군락을 방문하고, 백년초 씨앗이 오래전 구로시오 난류를 타고 멕시코를 떠나 태평양을 건너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설화’를 듣는다. 백년초의 이동은 100년 전 일본의 이민 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와 멕시코 이민 브로커의 합작으로 멕시코로 건너간 1000여명 한인들의 이동과 연결됐다. ‘좋은 일자리’란 광고에 속아 배에 올랐지만, 현실은 노예 같은 노동과 혹독한 차별이었다. 그들은 25개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져 삐죽삐죽한 선인장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며 그 섬유질로 배에 쓸 로프를 만들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으로 배에 쓸 로프가 많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올해 ‘MMCA 현대차 시리즈’ 작가로 선정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년 여행기’ 전시를 열고 있는 정연두와 e메일로 만났다.

제주도의 노팔 선인장, 2022, 잉크젯 프린트, 53×70 cm. 작가 소장.

“멕시코로 가는 길에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를 쓴 이자경 선생님을 미국 LA에서 뵙고 조언을 들었어요. 그중에서 ‘세상의 옳은 말들은 다 거짓’이라는 말씀이 인상에 깊게 남았습니다. 멕시코 이민자 후손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과 선조의 역사의 복잡성을 짐짓 옳아 보이는 말들로 결론짓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그들도 한국인이다’ ‘아픈 역사를 끌어안아야 한다’ 같은 옳은 말들로 말입니다.”

정연두는 멕시코 한인 후손들 개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중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이민 2세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 할머니의 인생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마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튀기’ ‘경칠 년’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아이를 낳지 못해 한국인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아이를 얻기 위해 7번의 결혼과 이혼을 한 여성이다.

“마리아 할머니는 ‘6번이나 소박맞고 7번째 결혼에서 아이를 간신히 얻은’ 한국의 고전적 여성상이 아닙니다. ‘6번이나 사내를 바꿔가며 아이를 얻고자 했던’ 강인하고 서구적인 분입니다. 멕시코 한인 후손들은 그분을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마체테(농기구)를, 또 다른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기억하십니다.”

전시의 핵심 서사를 보여주는 4채널 영상 설치 작품 ‘백년 여행기’는 마리아 할머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판소리와 일본의 전통음악 기다유(분라쿠), 멕시코의 마리아치 공연이 3채널 영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대사 내용과 운율에 맞춰 멕시코 풍경, 에네켄 농장, 후손들의 모습이 가운데 대형 화면으로 보여진다. 판소리와 기다유, 마리아치 공연을 통해 전해지는 강렬한 이야기와 작가가 현재적 시점에서 촬영한 멕시코의 영상이 어우러져 혼성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를 들려준다. 전시장 주변엔 삐죽한 에네켄, 우뚝 솟은 무륜주 등 선인장이 배치돼 있다.

“난 후회 없이 살았어. 부끄럽지 않은 인생.” 판소리로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이어 멕시코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보영주의 시 ‘나의 길’ 속 “낙망의 투구를 벗고, 흑암을 돌파하면서/ 미지의 길이나마 용진하려 하노라”라는 구절이 마리아치 공연의 노래로 전해진다. 이질적인 두 공연이 어우러져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의 ‘세대초상’.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그동안 제 작품에서 역사는 작품을 바라보는 맥락으로 존재했지, 표면으로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시를 위해 멕시코를 방문하고 후손들을 만날수록 역사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방식을 고민하다 음악을 통한 능숙한 전달을 선택했습니다. 영상을 통해 ‘현재성’과 ‘동시성’을 보여주면서 마치 오페라 무대 아래 오케스트라석처럼 서사를 음악으로 전달하는 구조를 택했습니다. 네 개 채널이 소리로서 서로 맡은 역할을 유기적으로 해내는 공연 같은 영상입니다.”

마리아 할머니가 7번째 결혼 후 낳은 아들은 2대의 대형 LED 패널을 이용한 전시 ‘세대 초상’에도 등장한다. 멕시코 한인 2~5세를 담은 영상에서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아버지와 딸 등 6세대의 가족은 마주 보는 모습이다. 1초에 500프레임의 속도로 느리게 재생되는 영상은 슬로우모션과 같아 관람객들은 그들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할머니와 이름이 같은 손녀 마리아는 한인 4세로 한국, 러시아, 마야, 노르웨이, 스페인 등 다섯 민족의 피가 섞였다. 이국적 외모의 마리아는 한복을 입고 춤을 추고, 아버지는 딸을 보고 미소 짓는다. 이들의 혼성적 모습에서 ‘민족’이라는 범주의 경계가 자연스레 흐려진다.

정연두는 사람들 개개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작업 방식에 대해 “사람 사이의 공감을 통해 세상을 드러내고 싶다”고 답했다. “백년 전 지구 반대편으로 갔던 사람들의 아픈 역사는 지금 우리들에게 공감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무관해보이는 대상과 사물간을 이어가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의 ‘날의 벽’. 설탕을 녹여 만든 농기구로 벽면을 가득 채웠다.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통곡의 벽에서 착안 ‘날의 벽’
디아스포라와 저항의 상징
시공 뛰어넘는 기묘한 여행
그 끝에 마주한 오늘의 한국

전시의 클라이맥스가 ‘백년 여행기’라면 하이라이트는 미술관 벽을 가득 채운 12m 높이 ‘날의 벽’이다. 설탕을 녹여 틀에 넣고 굳히는 방식으로 세계 각국의 농기구 ‘마체테’를 제작해 벽면 전체를 채웠다. 영상을 보고 고조된 마음이 웅장한 벽의 규모에 압도돼 차분하고 엄숙해진다. 식민지 플랜테이션의 대표 작물인 사탕수수란 재료를 통해 제국주의와 노동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한편 ‘설탕 뽑기’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친숙하고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서 착안한 ‘날의 벽’은 고된 노동과 디아스포라를 보여줌과 동시에, 농기구를 들고 봉기를 일으켰던 노동자들의 저항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연두는 “통곡의 벽이 유대인에게 성지이지만 벽 위의 하람 알 샤리프는 이슬람 3대 성지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군인과 요르단 군인이 서로 총을 겨누는 가운데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아이러니의 벽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의 ‘상상곡’. 사진 소농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인류를 먹여 살린 농기구의 벽, 사람들을 싼 노동력 때문에 이주시킨 벽, 이주자들이 일하기 위해 손에 쥐었던 사물들의 벽, 수확한 식물을 짜내고 다시 끓여서 만든 벽, 벅찬 노동과 핍박에 저항한 노동자들이 손에 든 무기들의 벽…. 상징하는 바는 많지만, 어릴 적 뽑기의 상품이 가득 찬 욕망의 벽으로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21세기에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한국인들도 과거 식민지배와 전쟁의 역사 속에 해외로 이주했으며, 해외 입양을 통해 아이들이 유럽이나 북미로 건너가곤 했다. 한국에도 많은 이주노동자와 난민이 있다. ‘백년 여행기’를 2023년에 감상한다는 것은 멕시코 한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멕시코 한인들의 이야기에 지금 한국에서 고된 노동을 담당하는 이주노동자와 차별, 편견에 시달리는 이주민의 모습이 겹쳐진다.

전시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담당하는 ‘상상곡’은 그 느낌을 증폭시킨다. 초지향성 스피커와 흡음제를 사용해 스피커 아래를 통과할 때만 들을 수 있는 외국어의 속삭임은 전시를 보기 전과 후에 전혀 다른 맥락으로 들린다. 처음에 열대 식물의 이파리와 열매 모양의 설치물 아래에서 듣는 외국어가 이국적인 느낌을 풍겼다면, 전시장을 떠날 때 듣는 속삭임은 한국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이주민들의 구체적 사연과 이야기로 들린다. ‘백년 여행기’ 끝에 마주한 것은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내년 2월25일까지 열린다.

정연두 작가. 사진촬영 소농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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