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슬리 도르나노 회장 “어머니가 집에서 대통령과 저녁을 먹을 때...세상이 더 보였다.”

최보윤 기자 2023. 10. 2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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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슬리 필립 도르나노 회장 단독 인터뷰
외가 폴란드 여왕혈통, 친가는 프랑스 군 장성
집 인테리어 ‘What a beautiful world’ 발간’
어릴때 주말 농장서 일해 직업 윤리배워
“집은 작품이나 물건이 아닌 사람이 주인공”
시슬리의 공동 창업자인 이자벨 도르나노(Isabelle d’Ornano)의 저서 ‘What a Beautiful World’ 출간 기념 행사에 참여한 시슬리 필립 도르나노 회장. /시슬리 제공

TV 드라마 ‘가십걸’이나 OTT드라마 시리즈 ‘브리저튼’’셀러브리티’ 등이 인기를 끈건 ‘보는 맛’도 한 몫한다. 뉴욕 맨해튼 최고의 부촌을 배경으로 욕망과 사랑·배신 등을 그린 ‘가십걸’이나 요즘 국내 신흥 귀족이라 불리는 인플루언서의 민낯을 다룬 ‘셀러브리티’는 드라마 만큼이나 화려한 명품 의상이 화제에 올랐다.

19세기 영국 귀족 가문의 명분과 사랑을 담은 ‘브리저튼’이나 미국 미디어 재벌가의 암투를 소재로 최근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 ‘올드머니(Old money·전통적인 부자) 패션’ 유행을 이끈 OTT 드라마 ‘석세션’은 어떤가. 최고 권력과 맞닿아있는 부유층의 각종 권력 다툼이나 꼬여버린 애정 문제 같은 극적인 스토리라인에서부터 집안 인테리어 장식 하나하나까지 대화의 중심이 됐다.

그런데 여기 진짜 ‘귀족의 삶’을 담을 책을 들고 최근 한국을 찾은 이가 있다. 프랑스 고급 화장품 브랜드 시슬리의 필립 도르나노(59) 회장. 그의 어머니이자 시슬리 공동 창업자이며 이 책을 실질적으로 완성한 이자벨 도르나노(86)는 폴란드 여왕의 후손으로, 어머니 집안은 미국 재클린 캐네디 여사 집안과 혼맥으로 얽혀있다. 필립 회장의 아버지 위베르 도르나노(1926~2015)는 프랑스 군 장성과 장관직까지 배출한 백작 가문 출신이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귀족’이자 요즘 말하는 ‘신흥 재벌’인 그가 가져온 책은 자신의 집안 인테리어와 그에 담긴 뒷 이야기를 실은 ‘왓 어 뷰티풀 월드(What a beautiful world)’. 프랑스 파리 본사와 런던 아파트, 루아르 지역 등에 있는 집 등 이자벨 여사의 취향과 손길이 담긴 내부가 고스란히 공개돼 있다.

책 겉표지만 보면 마치 베르사이유 궁을 보는 듯 여왕의 초상화부터 화려하면서도 빈티지한 카펫과 벨벳, 도자기에서부터 현대미술 작품이 발디딜틈 없이 배치돼 있는 모습에서 ‘돈’이 넘쳐날 것만 같은 모습.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가족 사진으로 벽을 도배한 인테리어, ‘love’ ‘hope’ 등 좋아하는 단어를 니들포인트(캔버스천에 놓는 자수)를 이용해 만든 쿠션 같이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멋스럽게 꾸밀 수 있는 요소들이 상당하다. 여백이 넘치는 흰색 ‘미니멀리즘’ 인테리어에 지친 이들에게 반가울만한 ‘맥시멀리즘’의 극치. “아이들(5명)을 키우다 보면 무질서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이자벨의 말은 매번 정리해도 혼돈의 카오스로 빠져버리는 워킹맘들을 위로해주기도 한다.

마치 박물관 같은 그 곳에서, 어릴 때부터 ‘귀족’이란 소리를 듣고, 저녁 자리에서 프랑스 대통령이나 미국 정치인들을 ‘아저씨’라 자연스레 부르며 자란 이의 삶은 어땠을까. 얼마 전 만난 필립 도르나노 회장은 “훌륭한 가족사는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내느냐”라면서 “부모님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 윤리(work ethics)를 항상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이자벨 도르나노의 집.
‘What a Beautiful World’책 속에서는 이자벨 도르나노가 수년에 걸쳐 만들어온 생활 공간, 그리고 업무 공간인 메종 시슬리와 파리 본사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책 속엔 당신 조상인 유럽 왕실 초상화부터 미 케네디 대통령과의 일화 등이 실려 있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자랐을 텐데, 부모님이 어떤 식으로 가르쳤는가. 예를 들어 사회 지도층으로 가져야 할 품격이나 책임감에 대해 교육받았다든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가족일 것이다. 훌륭한 가족사를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은 단지 영감을 줄 뿐이다. 당신이 하는 일이 당신을 이야기해주지, 부모님이 당신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업 윤리를 배우며 자랐다. 명절이나 방학기간엔 농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아버지가 항상 시키시는 일이었다.”

―예전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 이론을 창시한 미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인 하워드 가드너와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재능과 취향을 발견할때, 무엇을 가르치려기 보다는 아이들과 박물관 같은 곳을 많이 가보면서 어린 시절 많은 여러 종류의 것들을 흡수하도록 하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당신 어머니가 꾸며놓은 집을 보면 박물관을 따로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워드 가드너 교수 이론도, 책도 정말 좋아한다. 경영을 보는 방식에 영향을 받았다.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배경, 다양한 사회 계층에서 재능을 발견하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한국이나 프랑스, 일본의 장인을 보면서 그들의 작업에서 나오는 지능도 놀랍고, 스포츠 맨들의 지능 역시 마찬가지다. 관계 지능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예술은 살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가 가구를 좋아하셔서 아름다운 가구가 많긴 했지만 사실 책에 있는 현대 미술 작품 일부는 내가 어릴 때는 없었다(웃음). 집은 작품이나 물건이 아닌 사람이 사는 곳이다. 주인공은 사람이어야 한다.”

―당신의 방은 어땠는가.

“부모님이 자연을 매우 좋아하셨기에 아파트보다는 주로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좋았던 건 아파트나 시골 집에나 책이 많았고, 책에서도 볼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책을 정말 좋아해 일주일에 100권을 봤다. 지금도 50권을 볼 정도로 책을 끼고 살긴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학창 시절엔 기숙학교에 있던 시간이 더 많았다(웃음).”

침실 벽이나 복도에 쓰인 짧은 글들, 거울의 가장자리에 남겨진 시, 원래 있었던 것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미술품 등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으면 기준이 높아집니다.”라고 전하는 이자벨 도르나도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
침실 벽이나 복도에 쓰인 짧은 글들, 거울의 가장자리에 남겨진 시, 원래 있었던 것처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미술품 등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있으면 기준이 높아집니다.”라고 전하는 이자벨 도르나도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

―책에서 보면 어머니는 많은 유명 인사들, 사회 저명인사들을 집안에 초청해 저녁을 즐기기도 했다. 그녀가 ‘가장 유쾌한 정치인’ 중 하나로 꼽은 미국의 헨리 키신저의 통역을 자임하면서 민간 외교관 역할도 하고, 프랑스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어른들의 세계(?)에도 빨리 눈을 떴을 것 같다. 미국 뉴욕타임스 인턴 기자등을 하며 저널리스트의 꿈을 꾼 것도 그러한 배경이 바탕이 된 것은 아닌가.

“비록 꽤 어렸지만 스스로 사회 문제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분명 있다. 가장이든 기업 사장이든, 대통령이든 모두 가족이라 생각하며 우리 식구들이 어떻게 하면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더 즐겁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부모님은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에, 세상에 더 많은 자신감을 주려하셨다. 돌이켜 보면 그런 식탁에 앉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하면 가족 같은 직원들을 위해 ‘변호’할수 있을가를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지금은 중견 기업 협회 공동 회장을 맡고 있다. 프랑스에서 중견 기업이 사회적으로 국가와 기업에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관련 책임자들과 이야기할 자리가 있었는데 이러한 전문성과 노하우를 가진 중견 기업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직전에 한국 기업가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이 사회적 책임감과 긍정적인 영향력(impact)을 끼치고 싶어 회사를 차렸다고 말했다. 이러한 회사들이 많아지는 것이 국가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책 제목 what a beautiful world 와는 달리, 지금 세계 정서는 전혀 beautiful 하지 않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 하마스 무력 충돌 같은 것들 뿐만 아니라 각종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시기에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건 어쩌면 한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가족끼리 따뜻한 밥한끼 먹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요르단에서 가족 여행 중이었어다. 테러가 일어나기 이틀 전에 이스라엘을 건너왔다. 선은 많은 작은 행동에서 비롯되고, 악은 한 번의 행동으로도 나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돌보고, 돕고, 정상적인 상호작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작은 행동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도 전후를 극복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여러분의 노력과 창의성, 그리고 함께 뭉쳤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존경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러한 가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세상이다.”

―어머니가 쿠션에 수를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당신은 무슨 글자를 새겨놓고 싶은가.

“부모님 결혼 50주년 선물로 미국 유리 공예가겸 아티스트 롭 와인(Rob Wynne)의 FAITH(믿음·신뢰)를 선물해드린 적 있다. 세상이 서로 신뢰로 가득하다면 크고 작은 분쟁, 말다툼, 전쟁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다른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이런 걸 써 보면 어떨까. 내가 세상에 무언가를 가져왔을까? 유용했는가? 나는 긍정적일까?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가? 다음 세대에 안전을 주는가? 언젠간 모두가 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외칠 날이 오면 좋겠다. ‘What a beautifu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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