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유튜브 시대까지 ‘여성동아’ 90년 역사
‘여성동아’가 창간 90주년을 맞았다. 1933년 ‘신가정’의 탄생부터 여성지로서 정점에 오르기까지, ‘여성동아’의 화려한 역사를 정리했다.
"‘신가정’을 내기 위해서 거기에 매달린 사람은 나와 여기자 한 사람뿐! 허락된 정원은 두 사람이었던 것인데…."(1967년 11월 '여성동아’ 복간호 중)
드디어 1933년 1월 '여성동아’의 전신이자 90년 역사의 시작점이 된 '신가정’이 세상에 나왔다. 여성 독자를 고려해 제목만 국한문을 섞어 쓰고 기사는 모두 순 한글로 제작했다. 초대 편집장 이은상은 "한정된 필진에 원고 수집까지 힘들었다"고 말했지만 '신가정’에는 계몽에 초점을 맞춘 잡지답게 당시의 세계정세, 삼국시대의 여류문학, 동서양의 주요 여성 인물을 정리한 기사 등 다채로운 내용의 글이 실렸다. 이태준의 소설, 피천득의 수필,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동시, 현제명의 음악 칼럼 등 당대 작가들도 '신가정’의 한 대목을 차지했다.
‘신가정’은 매달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면서 주부들을 위해 요리, 뜨개질, 한글 철자법 등 다양한 강연을 열었다. 야유회, 밤 줍기 대회 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열어 당시 주부들에게 만남의 장을 제공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여성들에게 지식은 물론 커뮤니티 역할을 했던 '신가정’은 베를린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인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6년 9월, 45권의 책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복간 첫 특집기사는 '쓰개치마 벗고 60년’
그 외에 교통사고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나 남편을 금주시키는 방법, 웨딩드레스를 집에서 만드는 법 등 여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정보성 기사도 보인다. 문화주의를 제창한 '동아일보’와 '신가정’의 뜻을 이어 문화와 관련된 사업에도 힘썼다. '여성동아’ 복간호에는 박경리의 단편 '겨울비’가 실렸으며 복간 이듬해부터 '여류 장편소설 공모’를 시작한다.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를 통해 한국 문단의 거목 박완서가 등단한다. 그의 데뷔작 '나목’은 '여성동아’ 1970년 11월호 별책 부록으로 발간됐다. 신인 작가 등단 소감을 들어보자.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계속 좋은 주부이고 싶다. 나는 이 두 가지에 악착같은 집착을 느낀다. 나는 내 이 무모한 탐욕을 위해 조금 더 고단해야겠고 좀 더 수척해져야 할까 보다."
2010년대까지 이어진 여류 장편소설 공모를 통해 남지심(1980), 이남희(1986) 등의 작가가 문단에 등장했다.
‘여성동아’ 복간 10년을 기념해 나온 1977년 11월호에는 그동안 달라진 한국인의 생활 패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10월유신이 선포되는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개발이 활발히 이뤄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파아트(아파트) 단지 조성과 아파아트 생활권이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실내 구조,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가 수반됐다. (중략) 동시에 10년 동안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수 재벌은 엄청난 부를 축적한 데 반해 대다수 국민은 근근이 살아나간다."
복간 10주년 특집기사 외에도 마리아 칼라스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의 일생에 대한 기사, 탤런트 최불암 어머니와의 인터뷰 등 많은 여성의 이목을 끌 만한 소식을 실었다.
"신년이면 가계부를 구하기 위해 여성 잡지를 사는 주부들이 부쩍 늘어난다. 그래서 여성 잡지사들은 신년호를 평소의 두 배, 심하면 네 배까지 찍어낸다."(1979년 12월 14일 동아일보)
1970년대 부록으로 발간되기 시작한 가계부도 서점에서 '여성동아’를 집어 들게 만들었다. 1970년대 당시 여성지에서 발간한 가계부 숫자만 100만 부에 이를 정도였다. '여성동아’는 그 열기를 주도했다. 가계를 기록하는 용도를 넘어 요리법, 생활 상식, 전화번호, 기념일 등을 적을 수 있는 다이어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연말연시를 달궜던 가계부 열풍은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2000년대까지 이어졌다.
여성 권익 향상에 힘쓴 1980년대
1980년대 '여성동아’는 여성 권익을 증진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1983년 창간 50주년 기념 '사회 구조에 따른 여성의 역할’을 시작으로 매년 '21세기 여성 교육’ '한국 사회의 남녀 차별 의식’ 등을 주제로 심포지엄 및 토론회를 열었다.
1987년은 정치의 계절이었다. '여성동아’도 이에 발맞춰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1노 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가족과 친척들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구성했다. 이후 '여성동아’는 정치인과 퍼스트레이디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노태우 후보의 부인 김옥숙 여사(1990), 노무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2003),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2009) 등이다.
그 외에도 1987년 11월호에는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한 김소영 전 대법관, 납북됐다 미국으로 도피한 최은희·신상옥 부부 인터뷰 등이 실린다. 속옷, 분유, 주스, 무선전화기 등 올 컬러로 된 광고가 크게 늘어난 점도 1970년대 '여성동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변화다.
1990년대·밀레니얼의 '여성동아’
2000년대 포털의 도래, 2010년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기에 발맞춰 '여성동아’ 역시 지면의 한계를 넘어 온라인 기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는 등 독자와의 창구를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기조는 2020년대 들어 더욱 강해졌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67년 11월호에 실린 복간사에서 고재욱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여성동아’는 여러분과 함께 있고 여러분과 함께 전진하는 전체 한국 여성의 잡지임을 강조하면서 편달을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라고 밝혔다. 여성과 함께 걷는 잡지임을 천명한 '여성동아’는 이후 56년간 독자와 호흡하며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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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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