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사이 전략적 모호성, 한국 운명만 모호하게 한다
● 모호한 줄타기로 양쪽서 이득 얻자?
● 과거에도 러시아는 北 설득 의지 없어
● 서울이 아닌 워싱턴 염두에 두거늘…
● 美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 전복 꾀해
● 中에 유화책 펴도 대만 위기 영향권
미국 스탠퍼드대 국제관계학 학사,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정치학 석사 출신의 1998년생 필자가 창간 92주년을 맞은 잡지에 싣는 사회 독해법. <편집자 주>
"(한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신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됐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대한민국과 국민의 이익을 내주며 일본과 미국만 이롭게 하는 외교를 즉각 중단하라."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한국 정부가 서방과 빠르게 밀착하자 많은 이들이 '전략적 모호성'을 요청하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과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모호하게 줄타기를 해야 양쪽에서 이득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미동맹은 공고히 하되 실리는 챙겨야 한다'는 완곡한 표현도 나오지만, 결국 한국의 입장을 선명히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요지다.
대표적으로,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규탄을 두고 정치권 일각은 윤석열 정부가 러시아를 적으로 돌려 한반도가 위태로워졌다고 우려한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유엔(UN) 총회 기조연설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을 비판하고 북·러 무기 거래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에 '한국의 가치외교가 한·러관계를 파탄냈다'는 비판도 나온다. 남북관계 개선 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며, 러시아가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발해 북한을 돕는다는 주장이다. 러시아를 외교적으로는 규탄하더라도 실제 정책에서는 모호성을 추구하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한국의 우크라이나 정책이 러시아의 북한 정책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냉정히 판단해야 한다.
러시아판 '동아시아 회귀'의 민낯
첫째, 한국이 러시아를 우호적으로 대하면 남북대화가 활기를 얻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한·러관계가 우호적일 때조차 러시아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설득하지 못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과거 한국 정부는 '신유라시아 구상' '신북방 정책' 등을 통해 남·북·러 삼각 협력을 꾀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대륙 진출뿐 아니라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이 체제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 우려한 김정은 정권은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때 러시아는 북한을 설득할 지렛대도, 의지도 없었다.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북한을 한·러관계의 변수보다 미·러관계의 변수로 본다. 러시아가 2005~2008년 사이 6자회담에 참여한 것도, 2019년 푸틴이 김정은과 깜짝 정상회담을 연 것도, 모두 서울이 아닌 워싱턴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러시아는 유럽과 중동에서 미국의 작은 양보라도 얻어내기 위해 아시아 지역을 활용할 뿐, 러시아판 '동아시아 회귀'는 중국과의 '제한 없는 협력'을 제외하면 빈 슬로건에 불과하다는 게 서구 학계의 중론이다. 애초에 미·러관계가 파탄 나고 러시아가 국제 무대에서 극도로 고립된 이상, 러시아가 남북관계에 건설적 역할을 할 가능성은 적다.
둘째,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도와서 러시아와 북한이 밀착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 국방장관 세르게이 쇼이구는 북한의 전승절 70주년을 맞아 평양의 '무장장비 전시회'를 방문하고 북한 무기를 구매하려 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북한이 용병 그룹 바그너그룹에 로켓과 미사일을 판매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북한 노동자들이 러시아에 점령된 우크라이나 동부 재건 작업에 투입될 예정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2013년에는 '우리는 한국전쟁 당사자가 아니'라며 북한의 전승절 초청 자체를 거절했던 러시아다. 그만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다급하다는 방증이다.
최근 푸틴과 김정은의 정상회담 이후 러시아가 북한의 핵기술 고도화를 도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러시아가 폐핵추진잠수함이나 소형원자로 기술을 북한에 넘기는 시나리오까지 거론된다. 염려스러운 상황이지만, 이 또한 한국을 염두에 둔 움직임은 아니다. 푸틴은 핵 비확산 체제를 형해화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미국을 압박하려 한다. 세르게이 카라가노프를 비롯한 푸틴의 외교 책사들은 핵 비확산 체제가 미국에만 이득이라고 비판해 왔다. 북한뿐 아니라 또 다른 잠재적 핵무장 반미(反美) 국가인 이란과도 스스럼없이 결속을 다지는 이유다. 러시아 외교의 핵심은 미국 주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전복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핵 비확산 체제도 기꺼이 흔든다. 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물론 한국 정부는 북·중·러 밀착이라는 심상치 않은 현상을 긴밀히 주시해야 한다. 러시아의 외화가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상황도 우려스럽다. 김정은의 러시아 방문은 북한 역시 러시아의 답례를 최대한 얻어낼 것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설령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돕지 않는다고 해서 러시아가 북한산 무기를 덜 필요로 할까. 러시아는 한국에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북한을 돕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포탄 지원을 얻어내고, 우크라이나를 기사회생시킨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려고 한다. 이때 러시아는 한국을 미국의 종속변수로 생각할 뿐이다. 러시아는 설령 우리가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하더라도 북한의 협조를 구할 것이다.
베팅하지 않는 것도 베팅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우리는 위험한 베팅을 한 격이 된다. 합당한 우려다. 대러 전략적 모호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주로 러시아의 저력을 강조하는 이유기도 하다. 전략적 선명성은 미국이든 중국이든, 우크라이나든 러시아든 결국 어느 한쪽에 대한 과감한 베팅을 수반한다. 그에 따른 리스크가 상존할 수밖에 없다.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무력을 통한 현상 변경을 거부하고 자유주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만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서방의 적극적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가 적어도 쉽게 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냉철한 계산도 내포한다. 물론 이 판단이 무조건 유효할 것이라는 보장은 여전히 없다.
그러나 베팅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베팅이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외면해도 우리가 위험할 때 다른 국가들은 한국을 도울 것이라는 베팅, 흔들리는 유럽 안보가 인도-태평양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베팅 말이다. 우크라이나 지원보다도 위험부담이 큰 도박이다.
한국은 속도 조절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직접 포탄을 지원하는 대신 폴란드, 체코와 캐나다를 통한 우회 지원을 택했다. 실질적 효과는 비슷하지만 상징적 '자제'를 한 것이다. 안드레이 보르소비치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도 6월 한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한국이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러시아가 북한에 핵기술을 제공하거나 불용무기를 건네는 등 한국의 레드라인을 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급박한 우크라이나 전황에 따른 결정일 것이다. 러시아는 당장 미국과 유럽을 상대해야 한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보내는 45개국 중 하나일 뿐인 한국마저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일부 정계 인사들은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끼고 있다'고 주장한다. 전략적 모호성을 주장하는 측은 실리를 중시한다. 하지만 차분한 실익 계산 대신 관리 가능한 리스크를 부풀린다면 실리를 찾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한미일 삼각 공조에 대한 실익 계산도 마찬가지다. 8월 개최된 한미일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는 명확하다. 한미일 3국이 인도-태평양 전역의 이슈에 대해 정기적으로 상의 및 공조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예상됐듯이 세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결속에 반발하고 있다. 한미일이 인도-태평양 전반의 안보 공조를 강화하면 중국의 반응은 더욱 거칠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략적 모호성을 포기함으로써 '추가로' 가중되는 부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주변국들에 위험한 신호
미·중 경쟁의 핵심인 대만을 예시로 보자.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면 우리가 대만 분쟁에 연루될 위험이 높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미일 공조가 약화되더라도, 즉 우리가 중국에 소위 유화책을 펴더라도 한국이 대만 위기의 영향을 받게 될 가능성은 상당하다. 대만과 근접한 주한미군의 존재, '상호' 방위조약으로서 한미동맹의 기능, 대만의 역내 전략적/상징적 중요성, 대만 분쟁이 국제무역과 반도체산업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대만 분쟁에 미국의 시선이 쏠리면 북한이 한반도에서 도발을 감수할 가능성도 있다. 즉 전략적 모호성 속에서도 늘 상존하는 리스크와 전략적 명확성으로 가중되는 리스크를 엄밀히 비교해야 한다.회피의 비용도 생각해야 한다. 한국이 자유주의 질서 수호에 나서지 않았을 때 우리의 신뢰도에 가해지는 타격, 회피하는 동맹을 본 미국과 파트너들의 의지 약화 등은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질서의 폐해는 계산 자체가 의미 없어지는 재앙일지도 모른다.
미국 외교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핼 브랜즈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지난해 싱크탱크 윌슨 센터의 '미·중 경쟁 속 한국' 보고서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이 개입을 거부해 중국 억제에 실패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전후 동맹관계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전략적 모호성이 더욱 위험한 이유다. 물론 향후 미·중 모두가 연관된 개별적 사안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선명한 원칙도 없이 기회주의적 모호성을 추구한다면, 추후에 치러야 할 비용이 증대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미국, 일본과의 삼각 공조를 등한시한다고 북·중·러 결속이 느슨해지지는 않는다. 북·중·러는 외려 한국을 인도-태평양 안보 네트워크의 '약한 고리'로 인식해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다. 선택을 포기하는 것 자체도 하나의 선택이며, 명확한 정책의 부재도 하나의 정책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책임함은 주변국들에 위험한 신호를 보낸다. 충돌하고 갈라지는 세계 속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스스로의 운명만 더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홍태화 국제관계 연구자·英 케임브리지대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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