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물실험 폐지주장? …“韓 윤리문제 잘못 출제”

서정원 기자(jungwon.seo@mk.co.kr) 2023. 10. 26. 07: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철학거장 피터 싱어, 고교생 중간고사 오류 문의에 답변
“내 견해와 다르게 표현됐다”
2020년 모평때도 오류 지적
킬러문항 사라지는 수능
출제 정확도 더 높여야
피터 싱어 美 프린스턴대 교수 [사진 = Derek Goodwin, 피터 싱어 웹사이트]
국내 한 고등학교 내신 시험 문제 정답을 가리는데 세계적인 동물해방 철학자 피터 싱어까지 소환됐다. 문제가 잘못됐다고 학생이 메일을 보내자 싱어 교수가 직접 해당 문제는 출제 오류라고 답장한 것이다. 교육학자들은 수능, 모의고사, 내신 등 대입과 연관된 시험을 출제할 땐 최대한 논란이 없고 정확한 문제를 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25일 매일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일반고 학생 A군은 지난주 말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석좌교수에게서 중간고사 ‘생활과 윤리’ 문항이 출제 오류라고 확인받았다. 문항은 “싱어는 동물실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선택지가 맞는다고 봤다. 하지만 정작 인용된 당사자인 싱어 교수 본인은 “맞지 않다”고 한 것이다.

A군은 싱어 교수에게 “대부분, 일부라는 조건 없이 ‘피터 싱어는 고통을 초래하는 동물 실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지 않느냐”고 물었고, 싱어 교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피터 싱어는 동물권 운동가들에게 필독서로 알려진 ‘동물 해방’을 통해 동물 실험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책 ‘실천윤리학’에서는 “실제 실험에서 얻는 이득이 충분히 크다면, 그러한 이득을 얻을 개연성이 충분히 높고 동물들이 겪을 고통이 충분히 작다면, 공리주의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썼다. A군은 싱어 교수 답변까지 첨부해 출제 교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싱어 교수는 본지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자질구레한 질문들에 모두 답변해주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학생 말처럼 내 견해를 잘못 설명한 문항이었기 때문에 잠깐의 시간을 내 답할 가치가 있었다”고 했다.

피터 싱어와 관련한 출제 오류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교과서에도 언급될 만큼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자 중 70대로 비교적 젊고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여러 질의에 적극 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에는 고교 단위가 아니라 전국에서 치러지는 6월 모의평가에서도 문항 오류 시비가 있었다.

모의평가를 주관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피터 싱어가 “부유한 국가의 모든 시민들은 원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선택지가 틀렸다고 했다. 하지만 한 수험생 커뮤니티 회원이 직접 메일을 보내 “부유한 국가의 모든 시민들을 원조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답변을 받아 화제가 됐다. 평가원은 “이상 없음”이라며 번복하지는 않았다.

국어 영역에서도 수능과 모의고사 정확성이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다. 최승호 시인이 본인 시가 지문으로 출제된 문항을 풀어서 틀렸기 때문이다. 2009년 당시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문제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거 같다”면서도 “작가의 의도를 묻는 문제를 진짜 작가가 모른다면 누가 아는 건지 참 미스터리”라고 했다.

교육계 내부에서도 수능 출제 방향에 대한 견해가 엇갈린다. 현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수능은 지문 원작자의 의도를 추론하는 시험이 아니라, 지문을 바탕으로 유추하거나 요약하는 능력을 보는 시험이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대 쪽은 학생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논란이 될 수 있는 문제는 아예 출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맞선다.

다만 지금보다 더 수능, 모의고사 문제 질을 높여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모인다. 킬러 문항이 없어지고, 갈수록 수능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작은 문항 오류도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수능처럼 고부담·고난이도 시험은 원칙적으로 정답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문항을 출제해야 한다”며 “현존하는 사상가를 소재로 문제를 출제하는 걸 배제할 수는 없지만 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피터 싱어 교수는 객관식 문항 자체에 부정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는 “객관식 문항을 시험에서 아예 출제하지 않는다”며 “대신 학생들의 이해도를 보기 위해 5줄 이내로 서술하는 문제를 종종 내곤 한다”고 말했다.

피터 싱어의 동물권, 낙태 등 생명윤리학 논의 대부분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에 기초한다.

요약을 암기하고 객관식 시험을 치르는 현재의 수능 방식과, 사상가의 책을 읽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쓰도록 공부하는 방식 중 어느 것을 공리주의자로서 선호하는지 묻자 그는 “전자의 방식으로 보통 학생들이 얼마나 깊게 배울 수 있느냐와, 후자의 방식으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도 “더 나은 이해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답하며 후자에 다소 기울었다. 이어 “소수의 사람들이 먼저 깊게 이해하고 이를 발전시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며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