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민족주의와 국경에 갇힌 안중근···“‘조작된 허구’의 ‘장엄한 역사’ 편입 막아야”
도진순(창원대 사학과 교수)이 기자를 만나자마자 이끈 곳은 서울 남산 안중근기념관 앞 동상이다. 동상 하단부에 새긴, 유묵에서 따온 ‘大韓國人(대한국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한국은 ‘대한제국’을 뜻합니다. 즉 ‘대한국인’은 ‘대+한국인’ 즉 ‘위대한 한국인’ ‘영웅’이 아니라 ‘대한국+인’ 즉 ‘대한제국의 국민’ ‘One Korean’이란 뜻입니다. 이름 앞 국명 ‘대한국’은 국제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서명 유묵을 받는 이는 외국인(일본인)라는 걸 의미하고요. 그런데 우리는 보통 안 의사의 국제용 서명인 ‘대한국인’을 국내용으로, 또 ‘대+한국인’의 영웅으로 해석하기 일쑤입니다.”
그는 안중근의 ‘대한국인’을 축구 응원 구호 ‘대~한민국’에도 비유했다. “‘대~한민국’은 국내 K리그용이 아니라 국제적 A매치나 월드컵 경기에서 하는 응원구호다. 안중근이 국제용으로 쓴 ‘대한국인’을 국내용으로 오인해서 유묵을 받는 일본인 이름을 지우거나 삭제하고 국내용으로 비트는 것은 국내 팀끼리 붙는 K리그 경기장에서 ‘대~한민국’이라고 응원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도진순은 ‘안중근의 국제용 유묵’을 ‘국경 울타리 가뒀다’는 취지의 말로 설명했다. 뤼순 감옥 수감 때 안중근이 일본인들에게 유묵을 주면서 적은 ‘贈(증) 000’에 등장하는 일본인 이름, ‘드린다’는 의미의 ‘謹拜(근배)’를 후대 한국인들이 삭제하거나 지운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안중근기념관의 각석 유묵에도 일본인 이름이나 근배가 지워진 것이 많다.
https://m.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09280859001
도진순은 지난 3월 한국근현대사연구 104호에 실은 논문 <안중근의 ‘근배’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에서 ‘동양대세(東洋大勢)’ ‘사군천리(思君千里)’와 ‘장부수사(丈夫雖死)’로 시작하는 유묵 3점이 안중근에 대한 신문을 진행한 사카이 요시아키에게 준 것이라고 밝혔다. 이때까지 이 유묵들은 고종에게 바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근배’를 매우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무지와, 일본인에게 유묵을 준 것에 대한 애국주의적 거부감”을 ‘국경 울타리’에 갇힌 사례로 들었다.
도진순은 인터뷰 때도 “일본인들이 (정책·정략 등을) 바꾸라고 촉구하며 유묵들을 써준 것”이라고 이렇게 말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 핵심은 ‘문제는 일본이다’ ‘일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평화를 뒤흔드는 파괴범은 개화를 안 하거나 못 하고, 야만적이라고 비난 받는 (조선인 같은 아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문명화하고, 많이 배우고 잘 났다고 하는 일본인들이라고 비판한 겁니다.” 이어서 도진순은 “약소국과 강대국의 싸움에서 국가 대 국가의 싸움으로는 약소국이 이길 수가 없다. 그러니 ‘인간 대 인간으로 누가 옳은지 보자’며 국경을 넘어서는 것이 약소국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안중근의 ‘근배’ 유묵과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 논문엔 “그(안중근)의 최종 목적은 하얼빈에서 ‘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한 국제재판 등을 통해 ‘말’로서 본인의 거사 이유와 동양평화론을 설파하여 일본 침략 정책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도진순은 기념관 입구로 가면서 벽면에 새긴 유묵 중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을 ‘대한국인’이 외국인용 서명이란 점과 이어 설명했다. “한국인에게 ‘책 많이 읽어라’ 이렇게 써 준 것이 아닙니다. 일본인에게 ‘좋은 책 많이 읽어라, 즉 사람 죽이는 과학 기술책만 보지 말고 <성경>처럼 사랑과 평화에 관한 책들도 좀 읽으라’는 뜻으로 써 준 겁니다. 가톨릭에는 매일 미사라고 매일매일 성경 한 구절씩 읽는 게 있어요.”
도진순을 만난 건 안중근 의거일을 4일 앞둔 지난 22일이다. “사형 선고일인 2월 14일, 순교일인 3월 26일, 의거일인 10월 26일은 거룩한 날이지만, 한편으로는 안중근에 대한 또 어떤 희한한(?) 이야기들이 등장할지 조금은 우려스럽기도 한 날들입니다.”
‘희한한 이야기’ 중 하나가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다. “네가 만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는 MBC <무한도전>, JTBC <썰전>, EBS Culture <책밖역사>, KBS 2TV <해피선데이 1박 2일>, tvN의 <문제적 남자>,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 등에서 낭독 등 방식으로 소개됐다. 뮤지컬 영화 <영웅>도 주요 장면으로 처리했다. 도진순은 여러 검증을 거쳐 1994년 1월 일본의 사이토(齋藤泰彦) 주지 책, 4월에는 최서면 책에 각각 다른 버전이 만들어져 들어간 걸 밝혔다. 지난 2월 역사비평 132호에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의 ‘편지’와 ‘전언’, 조작과 실체>를 발표했다.
도진순은 이 편지를 두고 “이제는 일정한 병리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씨를 뿌린 사람과 더불어 대중들이 환호하는 ‘애국주의’가 배양의 온상이 되었다. 조작된 허구가 ‘장엄한 역사’로 편입되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호의를 지닌 주제일수록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엄정성, 애국적 주제일수록 비판적 사유가 허용되는 학문적 개방성이 견실하게 확보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급 기술자들은 훔치고, 시원찮은 놈들은 베낀다’는 말이 있어요. 대중문화계 사람들에게 학계의 많은 연구들을 능란하게 훔치라고 이야기하죠.” 연도 오류나 의상 고증의 오류 등은 큰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안중근 장사를 하려면 영화든 뭐든 잘 만들어야죠. 안중근이 변화를 촉구한 일본에서도 인기를 끌겠다는 각오로 만들어야 안 의사 유지를 이어받는 겁니다.”
시중엔 안중근의 의거가 일본 문호 나쓰메 소세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퍼졌다. 도진순은 2020년 12월 ‘역사학보’ 248호 낸 논문 <안중근 사진엽서와 국제연대: 비하와 찬양, 그리고 전용·전유>에서 이렇게 썼다. “나쓰메 소세키는 만년의 <점두록(点頭錄)>(1916년)에서 볼 수 있듯이 ‘군국주의가 인류에게 얼마나 파멸과 희생을 가져오는 것일까’라고 비판하며 세계 평화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1909년 안중근의 하얼빈 사건 당시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해서 뚜렷한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문(門)>에는 이토의 죽음을 영웅적으로 언급하는 대화가 포함되어 있다. 그 때문에 적어도 당시의 소세키는 안중근과 같은 부류로 묶을 수 없고 오히려 거의 반대의 지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에 갇힌 또 다른 오류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 이야기다. “우리는 왕인이 일본에 간 걸 두고 일본이 하수라고 부르는데, 일본은 당시 한반도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천황’ 품으로 들어왔다고 여겨요. 왕인은 일제 강점기 내선일체의 대표적인 역사 아이콘입니다. 식민주의의 전형적인 코드가 왕인입니다. 그런 취지에서 만든 왕인비가 일본 우에노 공원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선일체 운운할 수 없으니까 이 왕인비 안내판은 철거되고 없습니다.” 왕인이 내선일체의 역사적 아이콘이었다면 살아있는 상징이 바로 영친왕이었다고 도진순은 말한다.
도진순은 안중근, 독도, 위안부, 강제동원 문제를 “한국 역사 연구자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정해진 패러다임으로 인한 오류가 많습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수도, ‘거짓’을 말할 수도 있죠. 후자는 사실인 줄 알고 나중에 보니까 거짓인 경우인데, 허다하게 있습니다.” 에릭 홉스봄이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 위험하다”라는 취지로 말한 일도 거론했다.
도진순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갇힌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근대에 대한 열망이나 신 학문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고 했다. “이 점에서 최익현과는 대조적인 인물인데도 ‘위정척사’를 안중근에게 끼워 넣으려고 합니다.”
근현대사를 전공한 도진순은 ‘백범 전문가’로 알려졌다. 그가 펴낸 <정본 백범일지>는 가장 정확한 ‘백범일지’로 평가받는다. 안중근을 연구한 것은 유언을 본 뒤다. “안 의사 유언은 감사, 행복 같은 말들이 많아요. 너무 놀랐죠. 30년 6개월의 피 끓는 청춘이 ‘기쁘게 하늘나라로 간다’고 했으니까요.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언, ‘강보에 싸인 아들’은 비장하거든요. 안 의사 유언의 기쁨과 행복의 비밀을 풀고 싶었어요.” 도진순도 가톨릭 신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난 적도 있다.
지금 벌어지는 세계 여러 곳의 전쟁과 분쟁을 두고도 말했다. “안 의사는 현재 세계사의 중요한 문제이자 한국 현대사의 기본 문제인 ‘전쟁과 평화’를 두고 의미가 큽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누가 정의로운가? 누가 힘이 센가? 하는 ‘피의 복수전’ 같은 악순환이 아니라, 이것을 끊어내고 평화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도진순은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훌륭한 경지에 이른 시기는 사형 선고를 받은 3월 26일부터 죽음에 이르는 40일이라고 말한다. “‘자기 목숨을 제단에 헌납해서 동아시아 평화를 이루겠다’는 가장 위대한 점을,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에 가려진, 좁은 시야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탕, 탕, 탕!’만 기리는 겁니다.”
도진순은 안중근 의거일과 사형일만 기리는 현실을 지적한다. “옥중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살피지 않고 ‘안중근 의거가 훌륭하다’는 결론만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안중근이 지향한 동아시아 평화를 국제연대로 확대하려면 10월26일 그의 ‘죽임’보다는 3월26일 그의 ‘죽음’이, ‘전쟁’보다는 ‘평화’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진순은 다시 ‘대한국인’ 의미를 이야기했다. “사형 선고 이후 안중근은 더 큰 선의 세계에 도달합니다. 이토와 누가 진정 의로운 ‘영웅’인가를 따지는 것을 넘어서, 자기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로 ‘착하고 약한(仁弱, 인약) 한국 인민’과 함께하는 ‘(대)한국인’의 일원으로 죽게 됩니다. 의로움에서 거룩함으로 간 것이죠. 이것이 안중근의 최종 정체성입니다.”
안중근에 관한 오류를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인연을 맺은 여러 학자의 오류도 지적해야만 했다. 도진순은 “한국 사회에서 공부하는 사람치고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안에 따라 무리는 짓겠지만, 작당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진실을 좇아가는 것만도 바쁩니다. 학자는 외로워야만 하는 존재 같습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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