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신주기 '호통' 국감, 회장님은 "해외 출장 중"...올해도?
21대 국회 마지막 국정감사가 막바지를 향하는 가운데 대기업 총수 등 증인으로 채택된 기업인들이 불참사유서를 제출하고 출석을 회피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국회는 '해외 출장' 등을 이유로 끝까지 불출석한 증인들에 대해 고발 등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실제 고발로 이어지더라도 벌금형 약식기소에 그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반면 기업인들을 불러놓고 호통과 망신주기로 일관하는 현행 국감 증인심문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기업인들의 회피 시도는 매년 반복될 뿐이라는 자조섞은 반응도 나온다.
2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환노위)에 따르면 위원회가 종합감사에 추가 증인으로 채택한 허영인 SPC 회장, 이해욱 DL그룹 회장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이에 환노위는 해당 증인에 대한 고발 등 대응 방안 검토에 나섰다.
앞서 환노위는 지난 19일 전체회의에서 최근 계열사에서 신체 끼임 사망사고, 추락 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한 SPC와 DL그룹의 총수인 허 회장과 이 회장을 고용부 종합감사 증인으로 추가 채택했지만 지난 23일 허 회장과 이 회장은 모두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이들의 주요 불참 사유는 '해외 출장'이다. 허 회장은 네덜란드·프랑스 등 해외 기업과 안전 시스템 설비 및 산업재해 예방 및 관리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을 위한 해외 일정을, 이 회장은 미래 기술 확보와 신규사업 논의를 위한 미국 출장을 국가 불출석 사유로 들었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퇴직 종용 의혹을 받고 있는 CJENM의 구창근 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카타르 순방 동행을 불출석 사유로 제시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공정거래위 종합감사에 하도급법 위반 등으로 증인에 채택된 윤영준 현대건설 대표도 사우디아라비아 출장을 이유로 국감 불참 의사를 전달했다.
현직 금융지주 회장으로는 처음으로 국감 증인으로 채택돼 주목을 받았던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도 오는 27일 열리는 정무위원회 종합감사에 참석이 어렵다는 의사를 전달한 상태다. IMF(국제통화기금) 연차총회 참석을 시작으로 일본·싱가포르·홍콩 등 아시아 지역 주요 주주·전략적 제휴기관 17곳을 대상으로 해외IR 활동 중이라는 이유다.
국감 증인 출석을 앞두고 기업인들의 해외 출장이 이어지면서 '도피성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당장 환노위와 정무위는 불출석을 통보한 증인들을 상대로 고발 등 대응을 검토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행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국회증언감정법)'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 없이 불출석하면 국회 고발로 이어져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상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국정감사에 출석하지 않을 수 있다. 국회는 증인이 정당한 이유없이 출석을 거부한다고 판단되면 '동행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법적 강제력은 없어 그 실효성은 미미하다. 정당한 이유없이 불출석하거나 동행명령을 거부한 증인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을 받도록 국회가 고발할 수 있다. 이 경우 불출석 사유의 정당성을 결국 법원이 판가름하게 된다. 다만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벌금형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따라 국회 차원의 제도 개편도 추진했지만 논의는 진척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정감사의 증인 출석 등을 규정한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다수 발의됐다. 증인을 강제 구인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윤후덕 민주당 의원안이 대표적이다. 윤 의원은 "국정감사나 국정조사 등에서 증인의 불출석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국회의 기능을 약화시킴에 따라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권위 실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현재 국회의 국감 증인 심문제도가 기업인 '망신주기' '조리돌림'에 그친다는 비판도 있다. 한 대기업 대관담당자는 "기업 경영의 문제점을 정책적인 측면에서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기업인의 국감의 출석이 필요하다는 데는 동의한다"면서도 "출석해도 제대로된 답변할 기회조차 없지 않나"고 했다.
전직 대기업 대관 출신 한 인사는 "의원들이 전국에 중계되는 방송카메라 앞에서 기업인을 상대로 고성과 호통을 이어가면서 증인들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며 "기업인들이 증인출석에 부담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세계시장을 상대로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주요 대기업 총수나 CEO(최고경영자)의 경우 이미 수개월치 해외 일정이 미리 잡혀있는 경우가 많아 국감 출석 일정을 제때 맞추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고 했다.
여당을 중심으로 이러한 국감 증인 채택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앞서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번 국감 시작부터 불필요한 기업인 증인 채택을 자제하자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서면 질의와 답변, 국감 이후 현장 방문, 현안 관련 청문회 개최 등도 대안으로 제시했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달 2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매년 국정감사 때면 국회가 기업 총수들과 경제인들을 무리하게 출석시켜 망신을 준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고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용도로 증인 신청을 하는 등 제도를 남용한다는 지적도 있었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 있을 국정감사에서 여야를 불문하고 부당하게 과도한 증인신청을 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며 "기업들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 신청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지도록 뜻을 모아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jyou@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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