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년 동안 이어진 염원과 위로의 미술 [송주영의 맛있게 그림보기]

2023. 10. 26.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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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반전 있는 선사시대 미술 이야기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왼쪽부터) 마카판스갓 조약돌(Makapansgat pebble), 8.3x7x3.8cm. 웃는 얼굴 이모티콘. 장욱진, 얼굴, 캔버스에 유채, 40.9x31.8cm, 1957년.

여기 세 개의 얼굴이 있다. 왼쪽은 ‘마카판스갓 조약돌(Makapansgat pebble)’로 3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발굴터에서 발견됐다. 가운데 얼굴은 웃는 얼굴 이모지(emoji·감정표현 디지털 이미지)다. 오른쪽은 '동심의 화가'라 불리는 장욱진(1918~1990)의 작품 ‘얼굴’이다.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 모두 얼굴과 관련된 시각 이미지다. 웃는 얼굴 이모지와 장욱진의 그림은 인간이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만든 창작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다만 현대예술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은 장욱진의 그림이다. 웃는 얼굴 이모지는 정보전달 의도를 띤 것으로 디자인의 정의에 부합한다. 문제는 마카판스갓 조약돌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조약돌이다. 이 돌은 최초의 매뉴포트(Manuport)로 알려져 있다. 매뉴포트는 인류학자 메리 리키가 고안한 용어로, '인간의 손으로 옮겨오다'라는 뜻이다. 누군가가 자연물을 자기 의지로 이동시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유물을 일컫는다.

지구 위를 두 발로 걸었던 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여성이 수㎞ 떨어진 곳에서 이 돌을 주웠고, 굳이 계속 지니고 다녔다. 왜일까. 이 조약돌은 뗀석기와 같은 도구 기능이 없는 데도 긴 이동을 함께했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이 돌을 특별하게 여기며 움켜쥐었던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반전이 있는 옛날이야기

아주 먼 옛날 하이델이라는 노인이 살았다. 노인은 죽기 전 네안과 크롱, 두 아이를 낳았다. 네안은 죽고 크롱만 살아남았다. 이후 크롱은 많은 아이들을 낳았다. 크롱이 죽은 후, 아이들 사이에 크롱이 네안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말했다. “네안이 못생겼고 머리도 나빴대. 그런데 자꾸 아빠 음식을 훔쳐서 아빠가 죽인 거래!” 못생긴 건 악하고 나쁜 것이라며 수군댔다. 그러던 어느 날, 크롱의 아이들은 DNA라고 쓰인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놀라운 것이 들어 있었다. 네안의 유서였다. “나 네안은 나의 형제 크롱, 데니와 함께 살아서 행복했다. 내가 가진 것들을 이제 너희가 사이좋게 나눠 갖도록 하라.”

크롱의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네안은 바보가 아니었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줬는데 전혀 몰랐네. 그런데, 대체 데니는 누구야?”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물어볼 할머니, 삼촌, 이모, 아버지가 모두 죽고 없었다. 알고 보니 네안은 그림도 잘 그렸고 피리도 잘 불었다. 데니는 등산을 잘했다. 크롱의 아이들은 그제야 삼촌, 이모를 무시했던 자신들을 부끄러워하며 또 다른 비밀 상자는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고대 인류인 데니소바인과 네안데르탈인, 현생 인류와 같은 종으로 분류되는 호모 사피엔스가 계통학상으로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표현한 그림. 노벨상위원회 제공

위 이야기는 길고 복잡한 진화인류학의 족적과 최근 연구내용을 동화처럼 응축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DNA 상자를 열게 된 것은 불과 10년 전이다. 현재 30세 이상이라면 선사시대 역사를 새로 다시 배워야 하는 상황이다. 최신기술로 새롭게 밝혀지는 인류의 비밀이 연일 쏟아지고 있다. 유인원에서 인류가 갈라져 나온 것은 약 500만 년 전이다. 그 후손들이 약 300만 년 전 아프리카를 떠나 대륙으로 이동했는데 이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다. 약 50만 년 전 유럽에 정착한 하이델베르크인에게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이 갈라져 나왔는데 최근 데니소바인(Denisovan)의 존재가 새롭게 추가됐다. 크로마뇽인의 출현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 전인 20만~30만 년 전이다. 이들은 서로 이종교배를 하며 유전자를 나눴다.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콩알만 한 손가락뼈의 DNA로 이를 증명한 스웨덴 출신 진화인류학자 스반테 페보(Svante Pääbo) 박사는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지난 100년 동안 네안데르탈인은 지능 낮은 야만인으로 인식됐다. 19세기 말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은 아프리카·아시아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유럽인들에 의해 식민지 주민을 닮은 미개함이 특성이라고 알려졌다. 문명은 갈수록 진보한다는 ‘발전사관’에 따라 인류는 계단식으로 진화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면서 반전이 시작됐다. ‘네안’과 ‘데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물려줬다.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는 1~4%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있다. 데니소바인에게는 17%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있었다. 현재 파푸아뉴기니·필리핀 원주민에게는 약 5%의 데니소바인 유전자가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덕분에 우리는 면역력, 출산능력, 통증민감도를 얻게 됐다. 그러나 비만과 당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더 취약한 유전자도 네안데르탈인과 관련이 있다. 데니소바인 유전자는 인류가 티베트 고원에서 높은 고도에 적응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해부학 조상 vs 행동학 조상

약 1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 거의 모든 지역에 정착했다. 최초의 기술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은 다양한 석기, 작살, 바늘, 벽화, 조각품을 남긴 똑똑한 개척자들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20세기까지 믿었던 ‘호모 사피엔스의 위대함’이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알려진 새로운 정황으로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멋진 동굴벽화를 그렸던 1만 년 전의 사피엔스와 8만 년 전의 사피엔스가 해부학적으로 동일하다면 어째서 8만 년 전의 그림은 없는가.

8만 년 전의 사피엔스는 집단사냥을 했는데 이는 언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증거다. 언어는 이미지를 추상화하는 능력이다. 시각화 능력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8만 년 전 사피엔스의 그림은 없나. 미국 유타밸리대학의 미술사학자 트래비스 클락(Travis Clark) 교수는 8만 년 전 크로마뇽인의 그림이 없는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취약한 보존성이다. 정황상 그들은 얼굴과 몸을 장식했다. 이들이 사용하던 작은 악기도 출토됐다. 춤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특수 자연환경에서 우연히 잘 보존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라져 남지 않았을 뿐이다. 둘째, 우리가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관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마치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 그림처럼 완성 후 일부러 지웠을 수 있다. 셋째, 이 시기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미술품 흔적들이 있는데, ‘해부학 조상’보다는 ‘행동학 조상’으로 개념을 확장한다면 8만 년 전 인류에게 그림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2021년 영국 자연사박물관 연구팀의 논문 내용이 흥미롭다. 10만 년 전부터 안료, 장식품, 매장 흔적이 등장했고, 5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것으로 보이는 사슴뼈 장신구와 동굴벽화가 확인됐다. 다만 당시 크로마뇽인과의 이종교배가 있던 시기였기에 크로마뇽인의 영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네안데르탈인은 현생인류의 행동학 조상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비아 벨로 등 영국 자연사박물관 연구팀이 2021년 7월 발표한 논문 '네안데르탈인 예술 분석(Boning up on Neanderthal art)'에 실린 해부학적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유물 연대표. 연대표의 12번에는 최소 6만4,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그렸던 사다리 모양 기하학 그림이 나와 있다.

염원하고 위로하는 다정한 미술

선사시대 미술의 꽃은 동굴벽화다. 동굴에 살던 원시인들이 밥 먹고 시간이 남아서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했다면 엄청난 오해다. 주로 해안가에 위치한 이 동굴은 그들의 거주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일부러 빛 한 줄기 없는 컴컴한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3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조약돌에서 사람 얼굴을 알아봤듯이, 동굴 벽면의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연상되는 동물을 찾았다. 들소를 그리려고 동굴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벽면에 이미 존재하는 들소를 꺼내려고 색을 칠했다. 화가 옆에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내일 첫 사냥에 도전하는 소년이다.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거대한 들소 그림을 향해 소년은 창을 던진다. 죽음을 닮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먼저 들소를 죽인다. 들판에서 사냥에 성공한 소년, 아니 청년은 또다시 동굴 안 들소 앞에 서 있다. ‘너를 죽여서 미안하다’, ‘너의 영혼이 부디 안식하기 바란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들소의 기름과 안료를 입에 넣은 후 벽에 올린 손 위로 ‘후욱’ 뿜는다.

화가는 청년이 훗날 낳은 아이를 또 동굴로 데리고 와서 지난번 그림 위에 다시 들소를 그렸을 것이다. 사자 떼, 소 떼 무리를 그린 것이 아니라 한 마리를 반복해 겹쳐 그렸다. 그렇게 수만 년 반복했다. 학자들은 이 같은 동굴벽화가 ‘공감 주술(sympathetic magic)’용이었을 것으로 본다. ‘저주 인형’에 바늘을 찌르면 누군가가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래서 동굴벽화에는 인간 형상이 거의 없거나 추상이다. 한편으로는 죽인 짐승의 영혼이 사냥꾼을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는 제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굴 그림은 생존에 대한 염원이었으며 불안한 마음을 향한 위로였던 셈이다.

1909년 오스트리아에서 발견,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 알려진 손바닥 크기의 구석기시대 조각상도 마찬가지다. 이는 출산의 염원이자 생존의 불안을 달래는 위로 용도로 추정된다. 다른 동물과 달리 큰 머리 아기를 낳아야 하는 인간의 출산은 위험했고, 많은 아기와 어머니가 목숨을 잃었다. 300만 년 전 ‘마카판스갓 조약돌’을 손에 움켜쥐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암컷처럼, 난산을 극복하길 바라며 엄마가 딸의 손에, 남편이 아내의 손에 들려줬을지도 모른다. 동굴벽화에 나타난 사실적 표현 능력이 있었음에도 조각상은 유방과 엉덩이만을 강조하고 얼굴은 묘사하지 않았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일부러 안 한 것으로 보인다. 선사시대의 화가와 조각가는 그만큼 영리했다. 개인 추리가 아니라 학계의 공통 의견이다.

1994년에 발견된 약 3만 년 전 프랑스 쇼베동굴 벽화(왼쪽). 1908년 발견된 약 2만5,000년 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오스트리아 빈 자연사박물관 소장

2015년 캐나다의 인류학자 제네비에브 폰 페칭거(Genevieve von Petzinger) 박사는 지난 100년간 발견된 350개의 빙하기 동굴 유적지에서 발견, 확인된 32개의 기호를 조사, 발표했다. 여기에는 미개해 멸종됐다던 네안데르탈인이 그린 6만3,000년 전 그림도 있다. 단군왕검부터 대한민국까지 5,000년 역사를 13번 지나야 하는 시간이다. 오늘 올려다본 북극성은 사실 430년 전 임진왜란 때 조선시대의 별빛이 이제야 도달한 것이다. 6만3,000년은 430광년을 150번 왕복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애써 가늠하려 해도 느낄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미술은 있었다.

다시 세 얼굴을 본다. 원시 여성의 손에 들려 있던 아기 얼굴 같은 붉은 조약돌에도 염원과 위로가 있다. 귀와 코가 없는 얼굴을 실제로 본다면 무섭겠지만, 우리는 웃는 얼굴 이모지가 무섭다고 느끼지 않는다. 효율적 의사소통을 위한 추상성 덕분이다. 한국미술의 다정한 스승, 장욱진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창작자의 의도와 마음에 공감하며 각자 나름의 위로를 받는다. 세 얼굴 사이에 흐르는 300만 년의 시간, 여전히 미술(Visual Art)은 있다.

지난 100년간 350개 빙하기 동굴 유적지에서 확인된 32개의 기하학 형태의 그림 또는 기호들. 캐나다의 인류학자 제네비에브 폰 페칭거(Genevieve von Petzinger) 박사가 2015년 조사, 발표했다.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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