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중금속 피해구제 신청 두 달 만에 4000명 쇄도… 장항제련소에 무슨 일이
기업 상대 손배소 승소 계기로 급증세
구 장항제련소 일대 중금속 오염에 대한 피해구제 신청자가 최근 두 달 만에 4,000명가량 급증했다. 정부가 환경오염 피해구제 제도를 운영해 온 7년 동안 구제를 신청한 총인원의 몇 배 규모다. 일부 주민들이 기업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자 정부 피해구제 사업에도 관심이 급증한 형국인데, 제도 시행 이래 최대 규모의 피해구제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25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충남 서천군 구 장항제련소 인근 지역 중금속 오염과 관련해 지난달 4일부터 환경부가 환경오염피해구제급여 신청을 받고 있는데 지난달 30일까지 중간 집계 결과 3,229명이 신청했다. 실무를 담당하는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관계자는 “아직 집계가 진행 중이지만 최근까지 피해구제를 신청한 주민이 4,000명에 달한다”며 “매일 평균 100건 넘는 신청을 접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항제련소 오염은 2017년부터 피해구제 신청을 받았기 때문에 이번 신청 접수가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해까지 연평균 90명 수준, 올해 6월까지 총 466명에 머물렀던 구제신청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다른 사건과 비교해도 압도적 수치다. 환경부에 따르면 피해구제 제도가 시작된 2017년부터 올해 6월까지 장항제련소를 포함한 모든 사건의 구제신청 건수를 합해도 690건이다.
손배소 승소가 쏘아 올린 구제신청 장사진
장항제련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건립된 비철금속 제련공장이다. 1989년까지 50년 넘게 가동되면서 카드뮴‧비소‧납과 같은 중금속이 배출돼 대기와 토양이 오염됐고 주민들은 건강을 잃었다. 이곳의 공해문제는 1977년부터 제기됐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30년이 지난 200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환경부는 2009년부터 토양 정화를 시작해 2020년 완료했고, 2017년부터는 천식 고혈압 파킨슨병 만성신장병 등 51개 질환에 대해 주민 피해를 인정하고 의료비, 요양생활수당 등을 지급해 왔다.
오랜 사건에 갑자기 구제신청이 몰린 이유는 올해 초 일부 주민이 제련소 현 소유주인 LS일렉트릭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법원은 “주민들이 상당한 기간 신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중금속에 노출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 손해”라며 회사 책임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주민 및 유족 199명이 거주 기간과 지역에 따라 1인당 최대 1,000만 원을 배상받게 됐다. 이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건강상 피해를 인정받아 구제급여도 받고 있다.
승소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안에 대한 주민 관심도 크게 증가했다. 환경산업기술원과 서천군은 지난달 4일 장항군민체육관에서 설명회를 개최하고 구제신청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날 현장에만 주민 1,000여 명이 몰려 길게 줄을 섰다고 한다. ‘1936~2009년 내 제련소 반경 4㎞ 이내 5년 이상 거주’라는 조건이 맞는 주민이나 유족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구제급여를 신청하고 있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역대급 신청건수에 심사 지연 불가피
신청자가 폭증하면서 심사 지연은 불가피해졌다. 구제를 신청하면 통상 30일간 예비조사로 1차 선별을 한 뒤 60일간 본조사를 거쳐 급여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류 정리에만 한 달이 넘게 걸리고 있다. 환경산업기술원은 건강피해 조사 용역을 별도로 추진해 속도를 높이려 하고 있지만, 이렇게 해도 조사에 약 10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신청을 했다고 모두가 피해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오염과 질병 간 관련성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 가운데 고혈압·당뇨 등 비특이적 질환을 앓는 경우가 많고 이미 숨진 사람도 상당수라 심사 난도도 높다. 모든 오염피해구제 사건을 통틀어 신청자 가운데 피해를 인정받은 비율은 76.2%(526명)이다. 장항제련소의 경우 신청자 466명 중 69.5%(324명)가 피해 인정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손해배상 청구소송 승소가 피해 인정률을 높일 거란 기대도 있지만, 법원이 인정한 것은 '정신적 피해'라서 정부의 구제 대상인 '건강상 피해'와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신청자 규모에 비춰볼 때 제도 시행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구제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구제급여 자금원인 환경오염피해구제계정의 향후 지출도 지금까지 지급된 구제급여 총액(약 31억 원)보다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주민들은 LS일렉트릭 등을 상대로 2차 소송도 준비 중이다. 방훈규 장항제련소중금속오염 피해대책위 공동대표는 “1차 소송을 제기할 때 패소를 우려해 참여하지 못한 주민들이 많았다”며 “중금속 피해로 신체적·정신적 피해는 물론 공동체가 무너진 만큼 다시 한번 책임을 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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