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잊혀가는 독도와 ‘평화선’ 드라마
그러나 실질적으로 독도 실효 지배 완성은 이승만의 ‘평화선’ 선포
힘없는 나라가 힘에 의한 외교로 영토 지킨 한 편의 드라마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어제는 ‘독도의 날’이었다.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독도를 울릉도 부속 섬으로 제정했다. 20여 년 전부터 민간 차원에서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의 날은 10월 25일보다는 1월 18일이 더 실질적이라고 생각한다. 1월 18일은 대한민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쐐기를 박은 날이다.
대한제국이 독도 주권을 선언했다고 해도 실질적 의미가 없었다. 곧 일본에 병합돼 한반도 전체가 일본 영토가 됐으니 국제법적으로 독도도 일본에 속하게 됐다. 다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며 한국 일본의 모든 영토가 미국 관할이 됐고 독도 역시 이에 포함됐다. 독도의 곡절도 시작됐다.
일본 총독이던 맥아더는 ‘맥아더 라인’을 선포했다. 일본 선박이 나아갈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독도는 맥아더 라인 밖에 있었다. 자연스레 독도는 한국에 속하게 되는 논리적 결과를 낳았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각서 1033호도 구체적으로 일본 선박의 독도 해역 출입을 막았다. 주권이 없는 일본은 이에 항의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곧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불거졌다. 6·25 남침으로 한국과 미국이 전쟁에 정신이 없어지자 일본 어선들이 노골적으로 맥아더 라인을 무시하고 독도 인근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1951년 일본의 주권을 회복해 주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최종 합의됐다. 독도를 놓고 한일 간 싸움에 끼어있던 미국은 아예 이 조약에서 독도를 빼버린다. 일본의 주권이 회복됨과 동시에 맥아더 라인도 무효화됐다.
독도 영유에 대한 국제법적 보호가 일시에 사라지는 위기가 닥쳤는데 당시 한국의 해양력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세계적 해양 국가인 일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는 외교 귀신과도 같은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부산 피란 시절임에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2년 1월 18일 일방적으로 ‘평화선’을 선언했다. 바다 60해리까지 우리 영해라는 발표였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50해리 정도였으니 독도를 영토로 포함하기 위한 선언이었다. 당시 국제법상 영해 기준은 3해리였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이승만 라인에 일본은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어이가 없었다. 중공군 개입을 맞아 함께 피 흘리며 싸우던 미국까지 반대했다.
세상이 모두 비난했지만 이 대통령은 평화선을 넘는 일본 배들에 사정없이 총격을 가하고 나포했다. 평화선 선포 1년 뒤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를 지키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 입장에서 육지에선 중공과 싸우고 바다에선 일본과 싸우는 형국이었다. 1965년 한일어업협정으로 평화선이 없어질 때까지 300척이 넘는 일본 선박이 나포됐다. 4000명 가까운 일본인이 한국 형무소에 구금됐고 40여 명은 사망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은 했지만 실효적 조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지배는 바로 이 평화선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젊은 층은 ‘평화선’을 거의 모르지만 아무 힘도 없던 나라가 ‘힘에 의한 외교’로 영토를 지킨 드라마 같은 사례다. 6·25전쟁과 평화선 선포, 한미 동맹 체결까지 실로 이승만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승만의 외교적 선견은 알수록 감탄하게 된다. 중공군 개입 뒤 유엔군에선 일본군 투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일본군이 오면 먼저 일본군을 물리친 다음에 중공군과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존망 위기에 빠진 나라는 외부 도움은 무엇이든 받으려 한다. 하지만 그때 만약 일본군이 왔다면 두고두고 문제가 됐을 것이다. 1953년엔 대만군 투입도 논의됐다. 대만은 같은 반공 국가였지만 이승만은 이조차 거부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중국에 눌려 발전하지 못했는데 다시 중국인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1954년 이승만은 미국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최악의 한미 정상회담을 한다. 아이젠하워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요구하자 이승만은 단호히 거절했다. 화가 난 아이젠하워가 방을 나가버렸다. 돌아온 아이젠하워가 다른 문제를 논의하자고 하자 이번에는 이승만이 선약을 이유로 퇴장해버렸다. 그는 일본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이때 미국 의회 연설에서 “공산국가인 중국은 언젠가는 자유세계를 크게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954년 당시 중국은 몹시 낙후한 나라여서 이 예언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진주만 공격 예언처럼 69년 전 그의 중국 위협론도 오늘날 현실이 됐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자유 민주 가치를 공유하고 중국, 북한의 위협에 함께 대처해야 하는 관계다. 재일 동포 고교 야구팀의 방한까지 막았던 이승만식 ‘반일’은 더 이상 국익이 아니다. 그런데 국내 일부에서 이승만을 ‘친일’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힌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라 한때 정권을 맡았던 문재인 쪽 사람들 얘기다. 이들이 2019년엔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10인을 선정하면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을 뺐다. 그들이 얼마나 무지하며 심각한 편견에 빠져있는지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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