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시한폭탄 돼버린 은행 ELS

나지홍 경제부장 2023. 10. 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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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토막 난 홍콩 H지수 연계 상품… 내년 상반기에 수조 원 손실 우려
은행 불완전 판매 책임 면해도 신뢰가 생명인 금융업엔 치명상

“독일 국채 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천재지변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한 연 6%의 고금리를 받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가 1000억원이 넘는 고객 피해를 낳은 2019년 DLF(파생결합펀드) 사태 때 금융 당국의 주목을 받은 은행이 있다. 영국계 SC제일은행이다. 이 은행은 문제의 DLF 상품을 한 건도 팔지 않았다. 영국 본사의 엄격한 리스크 관리 정책을 한국에서도 그대로 따른 게 비결이었다.

지난 2019년 9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우리·하나 은행 파생결합상품인 DLF·DLS 상품 피해에 대한 국정조사 촉구 기자회견 및 호소문 발표'에서 한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남강호기자

다른 은행들이 DLF 판매에 열을 올릴 때 SC제일은행이라고 넋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은행도 미국의 이자율 스와프 금리라는 복잡한 기초 자산과 연계된 파생 상품 출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내부 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제동이 걸렸다. 이 위원회에서는 상품 판매를 요구하는 관련 부서장들이 ‘창’, 리스크 관리와 소비자 보호 관련 부서장들이 ‘방패’ 역할을 한다. 당시 회의에서 방패 쪽 부서장들은 “상품 구조가 너무 복잡해 고객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금리 하락 위험이 있어 고객에게 좋은 조건이 아니다”라며 반대했다. 격론 끝에 방패 쪽이 이겨 이 상품은 끝내 판매되지 못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SC제일은행은 고객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금융 상품을 판매했다가 손실이 발생할 경우 금융회사 임직원에게 책임을 물리는 영국의 투자자 보호 정책을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했다.

DLF 사태에 이어 라임과 옵티머스 등 금융 상품 사고가 잇따라 터지자 우리나라도 투자자 보호 장치를 한층 강화했다. 2021년부터 20% 이상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상품을 팔 때는 계약 후 이틀 이상의 숙려 기간이 지난 뒤 가입 의사를 재확인해야 계약이 유효하도록 했다. 나중에 사고가 났을 때 불완전 판매 여부를 가리기 위해 판매 과정도 녹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제도를 강화한다고 고객들의 피해가 줄어들까. 지금까진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내년이 문제다. 홍콩 H지수를 기초 자산으로 하는 ELS(주가연계증권)에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H지수와 연계된 ELS 중에서 손실 가능성이 있는 투자금 규모가 7조원에 달하고, 이 중 6조원이 내년 상반기에 3년 만기가 된다. 당국이 투자자 보호를 강화한 2021년에 판매된 것들이다. 상품별로 다르지만, 대략 만기 때 H지수가 가입 당시의 70%를 넘지 못하면 하락한 만큼 손실이 확정된다. 2021년 초 1만2000선을 넘었던 H지수는 6월 1만 선대로 떨어졌고, 최근 5800선까지 추락했다. 지금 지수가 만기까지 유지된다면 50% 가까운 2조~3조원의 손실을 입는다. 역대 최악의 금융 사고였던 라임 펀드의 피해액(약 1조6000억원)을 넘어서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다.

홍콩H지수와 연계된 ELS 7조원이 손실 구간에 진입했으며 이 중 6조원이 내년 상반기에 만기가 된다는 금융감독원의 9월 15일자 보도자료.

손실 우려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는 것은 투자자만이 아니다. 은행 출신 금융계 원로는 “평소 잘 아는 고객에게 정기예금을 해지하고 ELS 가입을 권유한 은행 직원들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라며 “시진핑 중국 주석이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발표해 H지수가 상승하기만을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DLF 사태 당시 독일 금리가 떨어지는데도 상품을 계속 팔아 문제를 키웠던 은행들은 2021년에도 H지수가 하락할 때 ELS를 판매했다. 주가가 상투를 찍고 내려가는데 주식 사라고 권유한 격이다.

투자자 보호 제도가 강화된 덕분에 ELS가 시한폭탄처럼 터져도 은행들은 상당 부분 책임을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 흐름을 읽는 은행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고객에게 손실을 끼쳤다는 사실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금융업에는 치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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