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서 발트함대를 궤멸시킨 日… 한반도서 러시아 氣를 꺾었다
에펠탑이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엑스포)를 상징했듯이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는 화려한 알렉산드르 3세교(橋)가 눈길을 끌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1892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당시에는 황제정 러시아와 공화정 프랑스의 동맹이 ‘야수와 미녀의 동맹’처럼 풍자되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동맹으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 국제 체제가 강박했던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났다. 러시아는 당시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던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동맹국 프랑스를 통해 견제하면서 만주와 한반도를 향한 팽창에 박차를 가했다.
러-프 동맹, 러시아의 동진 뒷받침
이미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선을 넘어서 1858년 아이훈조약, 1860년 베이징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태평양 연안의 연해주를 빼앗았다. 현재까지도 이 지역에는 지정학적 분쟁 가능성이 남아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시 러시아에 존재했던 지리정치적 심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유럽에서 우리는 식객이요 노예였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주인이다. …두 철도를 놓기만 하면 된다. 하나는 시베리아로, 다른 하나는 중앙아시아로.”
러시아는 프랑스의 자금을 끌어들여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러시아를 공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었다.
러-프 동맹으로 독일은 동서(東西) 양면 위협에 직면했다. 1896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인척이기도 했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서한을 보내 황화(黃禍·Yellow Peril)를 막기 위해 러시아가 유럽보다 아시아로 가야 한다고 부추겼다. 1898년 러시아는 일본에 반환을 압박했던 요동반도의 여순항과 대련항을 조차(租借)했다. 1900년 의화단이 러시아인들을 포함한 서양인들을 공격하자 러시아군은 연합 8국의 일원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고, 잔인하게 보복했다.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청나라를 지원하던 영국의 관심은 청일전쟁 승전국 일본으로 기울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제2차 보어전쟁(1899~1902)에서 겨우 승리한 영국은 제국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동맹을 맺지 않고, 균형자로서 이익을 추구하는 ‘영광의 고립(splendid isolation)’은 유럽에서는 가능했지만 러시아와 벌이는 그레이트 게임에서는 동맹이 필요했다.
고종 황제의 생존 외교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한국관(Pavillon de Corée)은 미므렐(Armand Mimerel·1867~1928) 자작 등 프랑스인들의 원조로 세워졌다. 대한제국 대표단 단장은 민영환의 동생 민영찬(閔泳瓚·1873~1948)이 맡았다. 프랑스 외교부는 민영찬을 “지성과 신중성을 겸비하고 탐구 의욕이 강한 30대”라고 묘사했다. 이범진(李範晉) 공사도 파리 세계박람회에 즈음해서 프랑스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전달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열강들에도 각종 이권을 제공해서 일본의 독점을 막고자 했다. 이미 두 차례나 경복궁에 난입했던 일본에 당하지 않도록 황실을 보위하는 것은 곧 국가를 보위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904년 동남아시아의 시암(타이·泰國)이 국제적 세력 균형을 통해 독립을 보전하기도 했었다. 각각 버마와 인도차이나를 차지한 영국과 프랑스는 후발 제국주의 독일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시암의 중립적 독립을 보장하는 영·프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시암이 누린 지정학적 행운은 대한제국에는 오지 않았다.
독립협회의 독립운동과 좌절
청일전쟁의 결과와 3국 간섭을 통해 만들어진 국제적 독립의 공간에서 고종 정부는 국제적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이에 비해 서재필 등이 주도한 독립협회는 개혁 자강을 주장했다. ‘독립신문’이 앞장서서 해륙군 육성과 무관학교 설치, 기기창 보수 확장 등을 호소했다. 그러나 한글로 된 ‘독립신문’도 읽을 수 없는 많은 ‘민’이 있었다.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가 이어졌지만 지방민까지 포괄하지는 못했다. 동학 농민 또한 기세가 꺾인 상황에서 대규모 국민군 창설은 요원했다.
1904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집계한 대한제국 육군은 8842명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러시아와 일본의 러일전쟁 당시 육군 병력은 각각 약 130만명과 약 120만명이었다. 해군력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고종황제가 독립협회를 해산함으로써 망국의 길을 재촉했지만, 독립협회 세력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불과 몇 년 만에 한반도를 놓고 벌어진 러일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국제적 3국 간섭에 눌렸던 일본은 39도선에서 러시아와 한반도를 분할하는 안, 이어서 만주와 한반도를 나누는 만한(滿韓) 교환론 등을 내세우며 러시아와 협상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기다리며 한반도의 영토 보전과 독립을 내세웠다.
고종은 러시아에 의존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부산 절영도(현재의 영도)에 태평양 함대가 이용할 석탄 저장소를 설치하려던 계획, 마산포를 조차하려던 계획 등은 독립협회의 노력으로 좌절되었다. 그것은 영국과 일본도 원하던 바였다.
1903년 5월 우크라이나 출신 코사크 기병대가 평안북도의 용암포를 점거했다. 대한제국의 허가를 받고 압록강 하구에서 삼림 채벌을 하고 있던 러시아 회사를 보호한다는 이유였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전쟁을 서둘렀다.
러일전쟁과 포츠머스의 평화로 빼앗긴 대한 독립
1904년 2월 제물포에서 러일전쟁이 시작되기 앞서 대한제국은 전시 중립을 표명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이 한성(서울)에 진주하여 강박한 한일 의정서를 통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연합국이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로 유학 보낸 청년들과 함경도 북쪽의 포수 중 일부는 러시아 편에서 싸웠다.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청일전쟁의 경험을 살려 연전연승했다. 국제 금융가에서 일본이 발행한 채권 가격이 치솟았다. 일본 채권의 구입에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 이후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에 분노한 유대계 미국 은행가 시프(Jacob Schiff)의 역할이 컸다.
다급해진 러시아는 발트 해양 함대를 투입하여 일본과 한반도를 차단하고자 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차단하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한반도 인근 해역에 도착한 발트 해양 함대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해군에 궤멸당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프랑스·영국·미국 등 세계열강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글로벌 전쟁이라는 의미로 제0차 세계대전이라고도 불린다. 미국 대통령 T. 루스벨트는 러일전쟁을 마감하는 포츠머스 평화조약을 중재하여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포츠머스의 평화는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권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가정(if)은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는 데는 불필요하지만 역사 정치학적 상상력을 키우는 데는 자주 활용된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1905년 일본이 강박한 을사보호조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요동반도와 만주를 장악한 러시아의 팽창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에서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한반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1922년 소련이 탄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크다. 러시아 황제정이 지속되지는 못했겠지만 완만한 개혁이 가능했을 수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