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명·손보미·정영선·정지아·천운영… 동인문학상 최대 ‘女風’
2023년 동인문학상에 유례없는 여풍(女風)이 불어왔다.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독회를 열고, 올해 최종심 후보로 구자명·손보미·정영선·정지아·천운영을 선정했다. 여성 5명이 최종심 후보에 오른 것은 동인문학상 역사상 처음이다. 2017·2020년 여성만 4명이 후보로 선정된 적은 있으나, 올해는 쟁쟁한 작품들이 본심에 올라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동인문학상의 영광을 안게 될 후보작은 ‘건달바 지대평’(구자명) ‘사랑의 꿈’(손보미) ‘아무것도 아닌 빛’(정영선) ‘아버지의 해방 일지’(정지아) ‘반에 반의 반’(천운영)이다.
올해로 54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다. 심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부터 매달 독회를 통해 독자에게 19편의 작품을 추천했고, 이달 말 최종 심사만을 앞두고 있다.
후보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단연 ‘여성’이다. 후보들 중 가장 최근인 2009년 데뷔한 손보미의 소설집 ‘사랑의 꿈’은 십대 소녀들의 욕망과 비밀 같은 내면을 그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다. 손보미는 “소설을 쓰는 행위는 타인을 탐구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며 “여자아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게 소설가로서 하고 싶은 일이라고 느낀다”고 했다. 1인칭 소설이 생소하다는 그는 작품을 쓰던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소설들 속, 여자아이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그것이 포함되어 있다. 순수한 관찰이라는 행위는 점점 옅어지고,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고 엄청난 거짓말을 하고 싶은 욕구에 진다.” 심사위원회는 “별것 아니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순간들이 손보미에게 포착되면 그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생의 한 순간이 된다”고 평했다.
천운영 소설집 ‘반에 반의 반’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비롯해 시대를 넘어선 여성들의 삶을 하나의 줄기로 이어낸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던 그들의 삶을 따사로운 시선으로 포착했다. 천운영은 작품에 대해 “내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에 기초했다”며 “그저 하루하루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 삶의 어느 순간을 단면으로 잘라내 보면, 어떤 무늬가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라고 했다. 이어 “그들의 이야기가 내 몸으로 건너올 때까지, 새겨들었다”며 “생이 끝나도 그들이 살아낸 이야기들은 여전히 이어지게 만드는 일, 그것이 소설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심사위원회는 “작가가 등장인물과 함께 뒹굴면서 그 인물이 뿜어내는 독특한 삶의 체취를 소설의 문체에다가 진하게 묻혀 온 것 같다”고 평했다.
정지아 장편 ‘아버지의 해방 일지’와 정영선 장편 ‘아무것도 아닌 빛’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각기 다른 색채로 담아냈다. 정지아의 작품은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굴곡진 현대사를 통과한 이들의 여러 얼굴을 보여준다. 이데올로기, 죽음 같은 어두운 면을 유머로 승화한 힘이 돋보인다. 정지아는 작품이 “좌와 우가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구례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어쩌면 관계의 본질,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했다. 2011년 서울을 떠나 구례에서 생활하며 겪은 일들에 대해선 “십 년에 걸쳐 찾아낸 답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사람이다!”라고 했다. 심사위원회는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시대와 인물들의 다층적인 면모를 생생하고 세세하게 그려낸다”고 평했다.
정영선의 작품은 부산 외곽의 서민아파트에 사는 노년기 주인공들의 회상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분단을 비롯한 역사와 얽힌 개인사를 그려낸다. 심사위원회는 “태평양전쟁과 한국 분단사를 다루되 더 깊게는 인간의 허무와 불안, 외로움의 저변을 희미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빛으로 비춘다”고 평했다. 정영선은 작품을 쓴 부산 금곡동에서 생활을 언급하며 “육신의 고통과 고단한 삶에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의지 그리고 어떤 근원을 느꼈던 것 같다”며“가끔 우리 사회와 내 의식 속에 식민과 분단이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 있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두 주인공을 통해 식민과 분단이 스며든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오직 문학으로 승부하겠다”는 각오도 덧붙였다.
문학의 역할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일 터. 구자명 소설집 ‘건달바 지대평’은 건달을 자처하는 주인공 ‘지대평’의 이야기를 통해 경쟁에 매몰된 삶에 질문을 던진다. 구자명은 “건달 인생으로 분류될 수 있는 두 형제가 있었다”며 “형제의 지상 이별 과정을 지켜보게 되면서 나는 그 주제의 작품이 그것 한 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이어 “효용과 효율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며 “인간과 시간의 존재론적 상관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 걸로 예상되는 앞으로의 내 작업이 그 관계를 좀 더 심도 있게 파고들 전망”이라고 했다. 심사위원회는 “개인은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해야 하며 사회와는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느냐 하는, 근원적인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고 평했다.
다음은 최종심을 앞둔 후보 작가들이 말하는 자신의 작품.
◇구자명
내게는 건달인생으로 분류될 수 있는 두 형제가 있었다. 하나는 세간에서 일컫는 건달 보스형으로 강남 일대에서 회장님으로 불리며 서른다섯 해 짧은 인생을 화려하게 살다가 병사하였고, 또 하나는 진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구석에서 정신수도만 하다가 마흔 아홉에 역시 병사, 그러나 일체 치료거부란 주체적 방식으로 자기 생을 종료한 도인형이다. 후자가 숨을 거두던 같은 해, 같은 달에 나는 건달 주제로 쓴 ‘뿔’이라는 단편으로 소설가 인생을 출발하였다. 등단작이 문예지에 발표된 같은 시점에 마지막 남은 형제의 지상이별 과정을 지켜보게 되면서 나는 그 주제의 작품이 그것 한 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형제들이 떠나고 나서도 내 삶은 온갖 건달형 인생들에 둘러싸인 채 그 특유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흘러왔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그들과 함께한 그 시간들에 내가 가장 나답게 살아 있었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다. 이는 곧 내가 그들의 하나였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나는 하필이면 왜 돈도 안 되고 현실적 효용 가치도 별로 없는 소설 문학―이제껏 내가 성취한 수준이 그러하다―이란 것을 하는 데에 지상의 아까운 밥을 축내며 얻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을까? 효용과 효율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정점에 AI 기술이 놓여 있고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든가 파멸시키든가 하리라는 양가적 전망을 살피느라 어질머리를 앓는 게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에 효용이나 효율과 거리가 멀뿐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를 지향하는 듯한 건달바들의 인생에 왜 내 소설은 굳이 천착하는 걸까? 아마도 인간과 시간의 존재론적 상관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 걸로 예상되는 앞으로의 내 작업이 그 관계를 좀 더 심도 있게 파고들 전망이라 당분간 스스로도 그 의문 속에 서성일 것 같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숨겨진 중심부가 있다.’고 한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의 말이 떠오른다. 소설을 쓰며 그 실마리를 찾게 되길 소망한다.
◇손보미
‘사랑의 꿈’의 첫 수록작 ‘밤이 지나면’은 여기 실린 작품 중 가장 먼저 쓴 것이다. 그리고 일인칭 여자 아이를 화자로 등장시킨 첫번째 소설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다 쓰고 나서 느꼈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과장되고, 황당하고, 혼란스럽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그 전에도 일인칭 소설을 쓴 적이 있긴 하지만, 일인칭 소설을 쓰는 건 내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어려운 일?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지도. 나는 소설을 쓰는 행위는 타인을 탐구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었다. 나는 잘 모르는 것, 타인, 세계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들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전달하고 싶었다. 진실되게 전달하는 것. 놀랍게도 이건 내가 습작을 할 때부터 이어진 생각이었다.
첫 소설을 쓴 스무 살 이후로 십구 년이 흐른 후, 나는 처음으로 어린 여자아이가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 ‘밤이 지나면’ 한번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다시 한번 더 쓰고,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쓰고, 그리고 다시 한번 더… 여전히 나는 그 여자아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게 소설가로서 하고 싶은 일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이 소설들 속, 여자아이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나의 그것이 포함되어 있다. 가끔씩은 아,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순수한 관찰이라는 행위는 점점 옅어지고,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고 엄청난 거짓말을 하고 싶은 욕구에 진다. ‘사랑의 꿈’에 나오는 소설들을 그런 과정들 속에서 쓴 것 같다. 나는 이게 소설을 쓰는 옳은 방법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내가 익숙하게 머물렀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왔고, 그리고 언젠가는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주 두려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영선
나는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설가이다.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소설을 쓸 때 보다 책을 낸 후가 더 힘들다. 내자마자 독자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적멸을 견뎌야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다. 이번에도 그 운명을 미리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쓴다. 얼떨떨하다.
부산 금곡동에서 몇 년간 ‘아무것도 아닌 빛’을 썼다. 양팔을 벌리면 한쪽은 금정산 한쪽은 낙동강이 잡힐 것 같은 아름다운 곳이다. 임대아파트가 많아 아픈 사람도 나이 든 분도 많은데, 다정하고 잘 웃고 친절한 분도 자주 만난다. 작은 화분을 사기 위해 꽃차 주변을 에워싼 분들을 본 날, 멀리 갈 것도 없이 이곳이 좋겠다 싶어 소설의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 꽃을 좋아한다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뭉클했을까. 볼 때마다 나는 꽃차 주변을 맴돌았다. 육신의 고통과 고단한 삶에도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과 의지 그리고 어떤 근원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빛으로 다가온 이후로 수정동, 영도, 삼척, 오사카, 야마구치를 불러왔다.
나는 가끔 우리 사회와 내 의식 속에 식민과 분단이 얼마나 어떤 모습으로 들어와 있을까, 생각한다. 그 생각들이 어떤 장면을 만나면 선명하고 구체화 되는데, 작가의 말에 쓴 시모노세키와 오사카 디아스포라 기행이나 조선학교 방문, 원폭 피해자 구술 기록 등의 경험이 그것이다. 소설을 쓰기 위한 경험들은 아니었는데 소설 속으로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많은 수는 아니지만 아직 생존한 분도 있으니, 그분들의 시점으로 써야 할 것 같았다.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원폭 피해로 가족을 잃은 조향자, 빨치산 활동을 하다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안재석, 두 주인공을 통해 식민과 분단이 스며든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사랑까지.
최종심이다. 그 누구도 아닌 문학을 응원하겠다.
◇정지아
2011년 어머니를 모시러 고향 구례에 내려왔다. 효녀여서는 아니었다. 그동안 어머니께 지은 죄가 너무 많아 마지막 가시는 길에라도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일이 년이면 족할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정정하시다. 백수를 바라보는 중이다. 나는 구례가 싫었다. 구례 사람은 누구나 내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는 익명의 서울을 사랑했다. 그 서울을 등지고 내려간 구례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썼다. 아니 쓸 수 있었다.
구례는 참으로 이상한 동네다. 구례 사람들은 1948년 여순사건 직후부터 1954년 초, 빨치산이 완전히 궤멸할 때까지 낮에는 군경에 시달리고 밤에는 빨치산에 시달렸다. 양측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집안이 드물 정도다. 그런데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들이, 때로는 피해를 주고받은 당사자들이 좁디좁은 구례 바닥에 모여 산다. 속으로야 밉든 곱든 겉으로는 함께 술을 마시고 서로의 경조사를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장례식장도 그러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찾아오는 조선일보 애독자에서부터 3일 내내 자리를 지킨 팔십 대의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마지막을 찾아준 사람들은 총천연색으로 다양했다. 그게 내 아버지의 인생이었고, 그런 인생을 사회주의자라는 한 마디로는 도무지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그토록 싫었던 구례에 내려와 살면서 답을 찾았다. 내가 십 년에 걸쳐 찾아낸 답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데올로기고 나발이고 사람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좌와 우가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구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면 관계의 본질,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좌와 우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여하튼 구례는 이러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판타지라고 했다. 구례에 와보시라. 이곳에서는 분명 현실이니! 구례에서는 왜 판타지가 현실이 되는지, 나는 또 알아가는 중이다.
◇천운영
어린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노는 어느 여름 계곡에서, 저고리를 훌훌 벗고 물속으로 따라 들어가, 어린애처럼 까르르 웃으며 놀이에 동참한 늙은 여인을 상상해 보았다. 늙은 젖가슴 위로 햇살과 함께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그 화사화게 빛나는 순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부끄러워 하지 않기를. 당당히 가슴을 내밀 수 있기를. 당신에게도 그런 환한 순간이 없었다 말하지 않기를. 이제 더 이상 그런 순간은 오지 않는다 여기지 않기를.
아이 하나 낳지 못하고 집안에서 쫓겨난 어린 시어머니를 다시 데려와, 자매인 듯 모녀인 듯 벗인 듯 살아온 두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 기이한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함께 쌓아온 시간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생판 모르는 남을 가만히 끌어안는 순간의 따사로움을 느껴보고 싶었다. 젖가슴을 물리듯 이부자리를 내어주는 어느 마음에 대해. 그 다감한 손길을. 봄밤처럼 고요하게 스며드는 충만함을. 잠든 아이의 들숨과 노인의 날숨이 한 숨결로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봄의 기운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어느 봄날,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하루, 그 하루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그 힘으로 남은 하루들의 삶을 이어나가지 않았을까. 자신의 세계만이 아니라, 불완전한 누군가의 세계까지 품어온 것이 아니었을까. 나의 충만한 하루로 당신의 하루도 함께 충만해질 수 있다면.
‘반에 반의 반’은 내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에 기초했다. 그저 하루하루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 삶의 어느 순간을 단면으로 잘라내 보면, 어떤 무늬가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주로 들었다. 이야기채집자처럼 기억을 채집했다. 쓰기보다 듣기에 집중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몸으로 건너올 때까지, 새겨들었다. 몸에 새겼다. 그들의 기억을 내 기억 속에 옮겨 담는 일. 생이 끝나도 그들이 살아낸 이야기들은 여전히 이어지게 만드는 일. 그것이 소설이라 생각했다. 반의 반의 상상력을 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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