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서정시대] 싸움에 진심인 여자들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본 건 일곱 살 때였다. 솜털 보송한 동갑내기 여자아이 둘이서 먼지 낀 싸구려 벨벳 드레스를 입은 채, 서로의 머리채를 성글게 쥐고 흔들었다. 뒷골이 쭈뼛하게 당기던 기분, 손가락 사이로 잡히던 상대 아이의 땀 젖은 머리카락, 구경꾼들의 함성, 온 몸에 돋던 소름과 열감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이기는 것보다는 끝내고 싶었던 마음, 분하기보다는 창피했던 기분도. 집으로 돌아와서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원 없이 떨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머리끄덩이’ 사건 이후로 나는 호전성을 잃고 급격히 허약해졌다. 평생 싸울 힘을 일곱살 때 다 써버렸기에, 주변의 전압이 높아질 때마다 머리가 하얘져서 무방비한 상태로 입을 다물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고양이가 햇살을 찾아 눕듯, 전투력 강한 정의로운 친구나 선하고 인정 많은 친구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그들에게 몸을 기댔다. 우정의 곁불은 따스했고 그렇게 나를 키운 8할은 동갑내기 보호자, 친구였다.
생애 두 번째로 머리끄덩이 사건을 목격한 것은 영화 ‘여배우들’ 촬영장이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스타들의 기싸움을 그린 영화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이 최지우의 부푼 사자 머리를 휘어잡던 그 순간. “아악~” 비명과 함께 한여름의 촬영장이 정적 속에 얼어붙었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들은 내게 ‘그 상황이 리얼이었느냐’고 묻곤 한다.
한류 스타 ‘지우히메’로 팬시한 느낌이 강했던 최지우에게, 고현정은 ‘센 드라마’를 만들어주고 싶어했다. 신파와 소문을 한데 꿰는 어마무시한 대사 “그러니까 쫓겨났지?”로 자신을 도발하라고 부추기며. 마침내 고압 전류가 흐르는 비상한 장면을 만들어낸 후, 고현정은 해사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언젠가는 여자들만의 진검승부로 에너지의 창날이 튀는 근사한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화제가 됐던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에서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죄수복을 입고 담담하게 싸우는 고현정을 보면서, 나는 15년 전 그 여름날의 스튜디오를 떠올렸다.
자아를 가진 힘있는 여성이 맡을 수 있는 최적의 배역이 팜파탈이었던 시절부터 나는 염정아와 김혜수를 사랑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아갈머리 찢어버릴라”고 으름장을 놓던 염정아의 생계형 전투력, “부장님은 사명감이 없으십니까”라며 낮고 위력적인 탁성으로 부장판사를 들이받던 드라마 ‘소년 심판’의 김혜수의 정의로운 저돌성 같은 것들을. 두 여자가 해녀로 분한 영화 ‘밀수’는 보는 내내 흐뭇했다.
스펙터클하고 글래머러스한 여자와 현실적이고 야무진 여자가 한 프레임 안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탄생 설화, 서로 다른 발화점을 지닌 두 사람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서로의 마음을 저격할 때조차 ‘이 싸움’은 감독의 오락적 설계를 벗어나 이미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칼칼한 남자 액션과는 달리 물속에서 서로의 몸을 수직으로 밀어주는 해녀들의 동선은 또 어찌나 수려하던지!
좋은 싸움이란 무엇일까? 싸움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여자들의 춤싸움을 그린 엠넷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2′는 싸움에 진심인 여자들로 북적였다. 심사위원으로 나와야 할 실력파 댄서들이 ‘잃을 게 많을 싸움’에 나와 ‘과정의 쪽팔림’을 감수한 이유는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배틀에 자비란 없었다. 한때 ‘원밀리언’에서 함께 활동했던 리아킴을 비난하며 전사의 춤으로 비수를 꽂은 미나명(미나명은 그뒤 원밀리언을 나와 새 팀을 꾸렸다), 차마 제자와 싸우지 못하고 눈물을 쏟던 스승 레드릭, ‘넘사벽’ 실력으로 가뿐하게 막내 도전자를 압도하던 리더 바다, 약자로 지목되었으나 알고 보니 괴력의 댄서였던 오드리… 약함이 강함으로 거듭날 때 일어나는 ‘각성과 파열’의 순간에, 대중은 열광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배틀은 대결에서 대화로, 서로를 향한 경이로 바뀌어갔다. 그토록 미워하던 ‘원밀리언’의 리아킴에게 안겨 전장을 떠나던 ‘딥앤댑’ 미나명의 마지막 눈물의 인사에서 나는 이 싸움의 진실을 알 것 같았다. “이젠 원밀리언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10년의 시간 동안 (리아킴에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에 앞서 존중을, 승부 후에 안부를 갈망했던 사람들, 싸움에 진심인 여자들이 오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