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걸려 손으로 그려낸 123분… 다음 세대에 보내는 거장의 편지

백수진 기자 2023. 10. 2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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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10년만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푸른 왜가리를 따라가다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발견하게 된 마히토(오른쪽)는 사라진 가족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대원미디어

미야자키 하야오(82)는 마냥 밝고 긍정적인 만화와는 거리가 멀다. 가장 가까운 동료인 스즈키 도시오 지브리 프로듀서는 그를 “건전함과 불건전함이 공존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작품엔 어둡고 슬프고 때론 기괴한 정서가 조금씩 깔렸고, 어른들을 홀리는 마력으로 작용했다. 은퇴를 번복하고 내놓은 10년 만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대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죽음에 가까워진 거장이 인생에 대한 회고와 다음 세대에 전하고픈 메시지를 꾹꾹 눌러 담았다.

먼저 개봉한 일본에서 호불호가 엇갈리며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대들’이 25일 국내 개봉했다. 서울 용산 CGV의 첫 상영 회차는 전날 매진을 기록했고, 아이맥스관도 500여 명 관객으로 꽉 찼다. 이날 오후 기준 예매율 66%로 압도적 1위.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이어 또 한 번 일본 애니메이션 돌풍을 예측하는 이들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대원미디어

주인공 마히토는 전쟁 중 화재로 엄마를 잃고, 엄마와 똑 닮은 이모를 새엄마로 맞는다. 도쿄를 떠나 새엄마의 집에서 살게 된 마히토 앞에 수상한 왜가리 한 마리가 나타난다. 왜가리는 ‘엄마는 죽지 않았다. 너를 기다리고 있다’며 이세계(異世界)로 마히토를 이끈다. 미야자키 감독이 어린 시절을 투영해 만든 주인공 마히토는 엄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그리움, 세상을 향한 분노가 뒤얽힌 인물이다. 내면의 악(惡)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소년의 성장담은 미야자키 버전의 ‘데미안’처럼 읽힌다.

관객은 마히토와 함께 시공간을 초월한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끌려 들어간다. 여전히 기발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에 감탄이 나온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팬이라면 반가워할 만한 특유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도 통통 튀어 다닌다. 다만 인과관계 없이 세계의 면면을 띄엄띄엄 보여주다 보니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대원미디어

AI로 며칠 만에 단편 영화를 찍어내는 시대에, CG 없이 7년에 걸쳐 인간의 손으로 그린 123분의 애니메이션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지브리 사상 최장 기간, 최대 제작비를 투입해 만든 만큼 그림의 완성도는 경이롭다. 주인공이 전속력으로 달릴 때의 박진감과 물과 불의 일렁거림,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의 생동감 덕에 티켓 값이 아깝지 않다.

영화는 자신을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이끌었던 친구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이기도 하다. 푸른 왜가리는 수십년간 든든한 조력자였던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 주인공을 다른 세계로 유인하는 탑의 주인은 선배이자 라이벌이었던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평생의 라이벌이자 자신을 애니메이션의 길로 이끈 선배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 /대원미디어

묵직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할아버지의 꼬장꼬장한 훈계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창조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을 지켜온 미야자키 감독다운 조언이다. 이 작품이 그의 은퇴작이 되지 않길 바란다. 이보다 더 밝고 친절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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