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안보 모두 충족”...빈 살만의 파트너, 일본서 한국으로

도하/최경운 기자 2023. 10. 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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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의 尹대통령 특급 환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각)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 무함마드 빈 살만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세자 겸 총리의 접견을 받고 있다./로이터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국빈 방문 마지막 날인 24일(현지 시각).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숙소(사우디 영빈관)에서 미래 투자 이니셔티브 포럼(FII) 참석을 준비하던 윤 대통령을 찾아왔다. 예정에 없던 깜짝 방문이었다. 두 정상은 23분간 통역만 대동한 채 환담했다. 이후 빈 살만은 벤츠 옆자리에 윤 대통령을 태우고 직접 운전해 포럼 행사장까지 데려다줬다. 빈 살만은 이동하면서 윤 대통령에게 “다음번에 오면 사우디에서 생산하는 현대의 전기차를 함께 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빈 살만의 외빈 특급 환대를 두고 사우디가 상정한 핵심 협력 파트너의 무게 추가 한국으로 기울고 있다는 분석이 외교가에서 나온다. 사우디는 과거 동북아의 핵심 협력국으로 일본을 상정했었다. 기름 한 방울 안 나기는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고, 오히려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 입장에선 일본이 한국보다 큰손이다. 그러나 빈 살만은 작년 11월 방한해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과 2시간여 함께 보낸 뒤, 일본 방문 계획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외교 관계자는 “첨단 제조업 기술력은 일본도 막강하지만 사막 지역에서 공사 기한을 맞추는 건설 경쟁력과 막강한 방산 역량까지 갖춘 한국은 사우디의 경제와 안보 수요를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파트너”라고 했다. 일본은 여러 제약이 있는 방산 분야가 한국에는 강점으로 꼽힌다.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 불리는 빈 살만은 어지간한 국가 정상들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 외교가에서 ‘은둔의 군주’로 불린다. 그런 빈 살만의 파격 의전의 기저에는 한국에 대한 신뢰가 깔렸다고 대통령실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1973년 삼환기업이 알울라~카이바 고속도로 건설 사업을 수주하면서 시작된 양국 경제 협력에서 다져진 신뢰가 사우디 지도부에 확실히 각인돼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위상과 국가 전략에도 변화가 있었다. 1970년대 중동 붐에 올라타 벌어들인 외화를 압축 성장의 마중물로 삼은 한국은 이제 건설은 물론 반도체·전기차 등 첨단 제조업 기술과 디지털 역량을 갖춘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그런 한국 발전 모델을 빈 살만이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픽=양진경

사우디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을 ‘도로와 교량을 공기(工期)에 맞춰 완공하는 나라’ 정도로 인식했다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실제로 이웃 아랍에미리트(UAE)가 2009년 12월 한국에 약 20조원 규모 바라카 원전 건설을 맡겼을 때, 사우디 왕가는 UAE 왕가에 “한국 기술을 믿을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당시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의 기술력을 지켜본 UAE 왕가에선 “한국은 다르다”고 사우디 왕가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우디 석유 관계자들이 국제 유가가 오를 때 종종 연락해 ‘미안하게 됐다’며 양해를 구한다”며 “과거엔 보기 어려웠던 일”이라고 했다.

사우디와 UAE는 수십 년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중동 지역과 세계 석유 시장에서 경쟁도 벌이고 있다. 두 나라의 이런 경쟁 관계가 사우디를 한국으로 이끌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윤 대통령의 사우디 국빈 방문도 올 1월 있었던 UAE 국빈 방문 이후 사우디 측이 강하게 요청했다고 한다.

이슬람 다수인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최근 시아파 이란의 지원을 받는 무장 단체 하마스·헤즈볼라 등이 잇따라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안보 불안감이 커진 상황이다. 최근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사우디에 대한 안보 보장을 조건으로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를 중재하고 나서면서 빈 살만은 중동 평화 복원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빈 살만은 UAE가 지난해 35억달러(약 4조7300억원) 규모의 천궁-Ⅱ 지대공미사일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지난 8월 UAE 전투 부대가 한국에서 첫 연합 훈련을 하는 등 양국의 활발한 군사 협력 관계를 관심 있게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다. 안보 소식통은 “사우디로선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지역의 맹주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70여 년간 수십만 상비군을 유지하고 무기 체계를 발전시켜온 한국의 방산 경쟁력을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빈 살만은 올해 38세인 젊은 군주다. 사우디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대 이하 청년층이다. 반면 미국발 셰일 혁명으로 인해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유가 통제권이 약화되고 청년 실업률도 높아지고 있다. 빈 살만이 ‘비전 2030′ 국가 전환 프로젝트를 들고 나온 까닭이다. 이 프로젝트는 석유 수출 의존형 경제 구조를 제조업 기술이 바탕이 된 신산업 구조로 바꾸는 게 핵심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이 신산업 기술을 일궈낸 점은 빈 살만에게 좋은 협력 모델일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23일 킹사우드대 강연에서 “여러분의 선조인 아라비아인들이 동서양 문물 교류의 선도적 역할을 했고 인류 문명의 발전과 풍요로운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고 한 것도 양국 협력 강화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차원이다.

외교가에선 K팝 등 한국의 문화 콘텐츠 경쟁력도 빈 살만을 한국으로 끌어당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빈 살만은 사우디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높다”며 “빈 살만은 체제를 안정적으로 이끌기 위해 젊은 층이 좋아하는 K콘텐츠에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빈 살만이 이끄는 사우디 국부펀드(PIF)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투자를 확정했고, 사우디 문화부 장관은 작년 방한해 CJ ENM 등 여러 엔터테인먼트 업체를 방문했다.

사우디 매체도 윤 대통령에 대한 빈 살만의 특급 의전을 소개했다. 현지 매체 ‘사우디 가제트’는 24일(현지 시각) 빈 살만과 윤 대통령의 운전석 환담에 대해 “왕세자는 윤 대통령을 줄곧 따뜻하게 대했으며, (공식 일정) 시작부터 윤 대통령을 진심으로 반기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기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사우디와 한국은 획기적인 협력을 통해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길을 열었다”고 했다. 사우디 일간 ‘아샤크알아우사트’는 “빈 살만 왕세자와 윤 대통령은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간 협정을 체결했다”고 했다. UAE 매체 ‘알아라비야뉴스’는 이날 FII에 참석한 윤 대통령의 연설을 인용, “사우디는 한국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신뢰하고 인정한 국가 중 하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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