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중동 사막에서 빛난 K기업군단의 진격

조일훈 2023. 10. 26.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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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해외순방서 드러난
한국 대표기업들 진가
전기차에서 수소·방산까지
전방위 협력 토대 제공
진짜 민생은 재정살포 아니라
밖에서 벌어 안을 살찌우는 것
조일훈 논설실장

삼성그룹이 사장단 업무용 차량을 SM5에서 현대자동차 에쿠스로 교체한다고 발표한 것은 2001년 3월. 요즘 시선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재계는 ‘화해 신호탄’이라고 해석하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1995년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한 이후 현대와 삼성의 관계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현대도 삼성의 텃밭 반도체 영역을 일찌감치 치고 들어간 터였다. 1990년대는 세계화와 디지털화 동이 트기 직전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선진국에 비해 기술과 자본이 빈약했던 기업들이 덩치를 키우기 위해 전자 자동차 건설 조선 석유화학 유통 등의 분야에서 피 터지게 싸웠다. 자동차만 해도 현대-기아-대우-삼성-쌍용이 격돌했고, 조선에선 현대-대우-삼성, 백화점에선 롯데-신세계-현대가 맞붙었다.

‘에쿠스 발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별세했다. 이건희·이재용 부자가 빈소를 방문했고 장례 이후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삼성 승지원을 찾아 감사를 표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기업인들의 창업 1기가 막을 내린 상징적 장면이다. 창업주들의 분투는 그야말로 고단하고 눈물겨운 여정이었다. 삼성전자는 일본 NEC로부터, 현대차는 미쓰비시로부터 온갖 견제와 핍박을 받으며 기술을 배우고 노하우를 익혔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기치를 내건 박정희 대통령은 이병철, 정주영 회장을 만날 때마다 “일본 수준이 100이라면 우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느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사람들은 재벌을 싫어했다. 그들의 돈은 부러워했지만 경영권이 2세, 3세로 내려가는 것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20년의 과정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몇몇 기업은 외환위기 등으로 좌초했지만 훨씬 많은 기업의 2세 경영자들이 ‘승계 콤플렉스’를 딛고 세계화 시대의 총아로 성장했다.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기업들은 “어느새 한국에 추월당했다”는 탄식을 내놨다.

대통령이 깃발을 든 해외시장 개척 대열에는 수십조원의 투자각서와 계약이 쏟아진다. 그 돈이 다 들어올까 싶지만 상대 입장에선 한국만 한 대안을 찾기도 어렵다. 대한민국이라는 백화점엔 없는 게 없다. 전통 제조업에 원자력, 바이오, 방위산업을 아우르고 CJ SPC 농심 같은 식품까지 가세한 전방위 포트폴리오다.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는 현대건설 삼성물산 네이버 KT 한화 GS HD현대 두산 등 한국 기업 군단이 분할점령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해외 문물 교류’ ‘사진 찍기’라고 폄하하고 조롱했지만, 개딸과 법정에 갇힌 탓인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는 듯하다. 눈길을 해외에 두지 않으면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구조다. 안에서 재정 털어먹자는 것은 가짜 민생이고 바깥에서 벌어 일자리 만들고 세금 내도록 하는 것이 진짜 민생이다.

권력이 돌아가며 쥐어박아도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애국적이다. 해외법인 수익도 가급적 국내로 들여와 세금을 낸다. 과거처럼 서로 견제하거나 반목하지 않는다. 최근 현대차가 삼성SDI와 배터리 분야에서 손을 잡은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 상대는 애플 테슬라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BYD 등 거대 인구와 시장을 등에 업은 세계적 기업들이다. 젊고, 트여 있고, 해외 정세에 밝은 이재용 정의선 같은 기업인은 더 이상 국내 키높이 경쟁에 관심이 없다.

꿈나무 기업들의 미래도 차곡차곡 영글어가고 있다. 24일 밤(현지시간) 리야드에서 열린 대통령 만찬 테이블은 낯선 이름의 중소기업과 스타트업 대표들로 채워졌다. 전기차 충전, 디지털 관광업, 인공지능(AI) 기반 농업 등을 영위하는 기업인들이다. 폴란드 베트남 인도네시아 순방에서는 오랜 세월 업력을 쌓아 올린 전문기업들이 한국 산업생태계의 완성도를 보여줬다.

돌이켜 보면, 주바일 신화의 실상은 한국인 건설인력 수출에 다름 아니었다. 기술이나 공법이 아니라 24시간 작업과 공기 단축이 경쟁력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 사업을 시작한 계기도 해외 건설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현지 인력 관리가 쉽지 않았고 열대와 극지를 넘나드는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는 것은 또 다른 괴로움이었다. 차라리 국내에 사업장을 몰아넣는 게 낫겠다고 여겨 구상한 것이 조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타르에서 또다시 선박 수주 대박이 쏟아졌다. 한때는 미약한 출발이었으나 이제는 미래 차, 스마트시티, 수소에너지, 우주항공으로 창대해진 것이 50년 중동 개척사다. 앞으로 일궈나갈 또 다른 신화와 기적도 별처럼 반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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