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 위스키 나올 수 있을까?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어느 순간 주위에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입맛은 제각각이고 위스키 종류는 수천 가지. 본인의 취향만 알아도 선택지는 반으로 줄어듭니다. 주정뱅이들과 떠들었던 위스키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당신의 취향은 무엇인가요?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747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9월, 한국 최초 위스키 증류소인 경기도 남양주시 ‘쓰리소사이어티’ 증류소 앞에 긴 줄이 늘어져 있었습니다. 캠핑 의자와 방한 도구를 챙겨놓고 아침부터 대기 중인 인원은 대략 40여 명. 오후 6시, “입장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긴 기다림을 견디던 사람들이 증류소로 밀려 들어 갔습니다. 이날 발매된 국산 싱글몰트 기원 ‘배치 3’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연차를 내고 아침부터 줄을 섰다는 위스키 애호가부터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왔다는 사장님까지. 다양한 사람이 몇 없는 국산 위스키를 선점하기 위해 몰려들어 현장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마지막에는 무려 필리핀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외국인까지 합류했습니다.
이날 현장에서 주력으로 판매된 제품은 총 3가지.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를 사용한 기원 배치3와 물을 타지 않은 CS(캐스크 스트렝스) 버전, 그리고 증류소 한정으로 60병만 출시된 메이플 시럽 캐스크입니다. 그중 눈에 띄었던 제품은 메이플 시럽 캐스크인데, 실제 메이플 시럽을 담았던 오크통에서 시럽을 빼고 위스키를 넣어 숙성한 제품이라고 합니다. 홀린듯 긴 줄에 따라선 제 품에도 메이플 시럽 캐스크 한 병이 안겨 있었습니다.
◇국내산 위스키는 발전 중
이날 발매를 기념해 증류소 앞마당에서는 위스키 구매자를 대상으로 바비큐 파티와 함께 쓰리소사이어티에서 내놓은 위스키 시음회도 열렸습니다. 저도 메이플 시럽 캐스크를 구매한 덕분에 몇 가지 신제품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증류소에서 시음을 위해 준비한 술은 ‘배치 3’, ‘배치 3 CS’ 그리고 ‘아메리칸 버진오크’였습니다. 배치 1, 2에서 발전된 부분이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맛을 봤습니다. 배치3에 첫입을 댄 순간 의심은 안도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일단 ‘셰리 맛’이 느껴졌고, 3년 이하 숙성된 위스키치고 맛도 생각보다 괜찮았습니다. 알코올 도수도 기존 배치들보다 높은 46%로 출시해 현장 반응도 좋았습니다.
시간을 두고 마셔보니 캠벨 포도 껍질 속살의 촉촉한 포도 맛과 가벼운 밀크 초콜릿, 와인의 타닌감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졌습니다. 셰리 위스키 특유의 매운맛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안정된 맛을 보여줬습니다.
다음으로 시음한 제품은 CS 버전. 워낙 저숙성 CS 제품들이 위스키 시장에 많다 보니 꺾어야 할 경쟁자가 많은 친구입니다. 다행히 CS 제품도 고도수 셰리 위스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진득한 단맛과 견과류의 고소함, 초콜릿 등의 뉘앙스가 잘 나타났습니다. 물론 고숙성 스카치위스키에서 느껴지는 감칠맛과 풍성한 보디감 등은 다소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국내산 위스키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데는 다들 큰 이견이 없었습니다. 근데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지는 대해서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원가보다 세금이 더 붙는 위스키
다양한 시도로 눈에 띄게 맛이 개선되고 있는 국내 싱글몰트 위스키. 문제는 비싼 가격입니다. 위스키 구매는 밸런스 게임과 같아서 소비자들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서열을 정합니다. 맛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가격을 빼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제아무리 맛있고 훌륭한 위스키도 개인마다 설정한 ‘선’을 넘는 순간 선택지에서 제외됩니다. 같은 가격이라면 맛이 검증된 위스키를 선택하지, 이제 막 증류를 시작한 신생 업체에 베팅하진 않을 것입니다. 단순 팬심에서 구매 동력을 찾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위스키 애호가들의 니즈는 명확합니다. 밸런스 게임에서 살아남아야만 구매로 이어집니다.
우리나라는 1968년부터 위스키나 소주 같은 증류주에 출고가가 높을수록 많은 세금을 책정하는 ‘종가세’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장인정신을 발휘해 공들여 만들수록 판매가가 폭등하는 구조입니다. 국내 위스키의 경우 병입과 동시에 72%에 해당하는 ‘세금 폭탄’을 맞게 됩니다. 수입 위스키는 관세 20%에 주세 72%를 매기고, 여기에 교육세(30%)와 부가가치세(10%)까지 붙습니다. 해외에서 물건을 들이면 위스키 출고가의 155%가 세금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원가가 1만원인 위스키의 경우, 세금만 1만5000원이 붙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가격이 높아질수록 문제는 더 커집니다. 원가가 30만원인 위스키에 종가세를 적용하면 약 76만원이 되는데 단순 계산으로 세금만 46만원이 붙는 셈입니다. 정말 무지막지합니다.
◇위스키 주세법 완화될까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최근 야당에서 ‘종량세’를 도입하자는 주세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된 것입니다. 이들은 국내 증류 업체의 세 부담이 높아, 신제품 개발과 품질 고급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세금 완화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종량세는 술의 도수와 양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방식입니다. 원가가 1만원인 위스키와 100만원짜리 위스키의 도수와 용량이 같다면, 균등하게 똑같은 세금을 부과하는 형태입니다.
현재 OECD 회원국 중 한국 등 5국을 빼고 나머지는 종량세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자국 주류 산업 활성화를 위해 1989년부터 종량세를 도입했습니다. 골자는 자국 주류 산업을 보호하면서 소비자의 선택권도 넓혀주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실제로 세법이 개정된 이후 여러 증류소가 설립되고 다양한 증류주가 출시되면서 재패니즈 위스키의 위상이 세계적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세제 개편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논의가 뜨겁습니다. 소비자로선 매우 긍정적입니다. 국내 위스키 가격이 비싸다고 판단되면 바로 해외 직구로 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 155% 내던 세금이 절반으로 감면되면 선택 폭이 굉장히 넓어지게 됩니다. 한편 국내 증류소들은 가격 경쟁보다는 품질 차별화를 통한 프리미엄 증류주 개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양질의 술을 합리적인 가격에 거래할 환경이 구축되면, 자연스레 시장 평가를 통해 부실 제품은 걸러지고 좋은 제품들만 남는 선순환적인 생태계가 구축될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일교차가 커서 위스키를 숙성하기 좋은 조건이라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오크통 숙성 시 연간 증발량이 1~2%에 불과하지만, 한국은 10%에 육박합니다. 극단적인 일교차로 인한 증발량이 커 양적으로는 손해지만, 그만큼 빠른 화학반응으로 기존에 없던 재밌는 위스키가 탄생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어떻게 하면 증발을 더 많이 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세계적인 추세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최초의 ‘한국 위스키’가 탄생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곧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스키디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75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