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가자는 1923년 9월 간토와 통한다

한겨레21 2023. 10. 2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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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티케팅을 만만하게 봤다가 빈손으로 부산에 갔다. 동행에겐 영화를 못 보면 그냥 여행한 셈 치자고 했지만 미련이 남아 부지런히 취소표를 체크했다. 상기된 얼굴의 시네필로 북적이는 영화의전당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밤, 곧 시작될 영화가 매진이 아니라는 소식을 듣고 잽싸게 예매에 성공했다. 그렇게 보게 된 단 한 편의 영화는 <1923년 9월>. 일본 간토대지진 이후 일어난 비극을 소재로 했다는 정보 외에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도 모르고 극장에 들어갔다. 이윽고 스크린에 등장한 이우라 아라타, 나가야마 에이타 배우의 익숙한 얼굴이 반가웠다.

대지진이 흔들어놓은 마음

간토대지진 이후 발생한 학살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반정부 활동가, 부락민도 대상으로 삼았다. 끔찍한 지진을 겪은 사람들이 품은 두려움·불신·분노의 방향이 혹여나 정부를 향할까 우려한 통치세력은 온갖 적의가 향할 곳을 지목했고, 유언비어는 들불처럼 퍼져나가고 말았다. 그중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춘 구체적인 사건은 낯선 마을에 도착한 일본인 행상단이 조선인으로 오인당해 죽은 ‘후쿠다무라 사건’이다.

이 영화를 만든 모리 다쓰야 감독은 주로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피디(PD)였다. 감독은 일본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을 접하고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려다가 촬영이 쉽지 않아 극영화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자국의 어두운 역사를 직면하려는 시도인 이 영화는 제작비 마련의 어려움을 크라우드펀딩으로 풀어내면서 오히려 많은 사람의 지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영화가 공들여 보여주는 것은 마을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말을 돌보고, 두부를 만들고, 배를 띄우고, 농사짓는 등 언뜻 잔잔해 보이는 일상의 뒷면에는 오랜 전쟁이 남긴 상흔과 피로감, 혹은 부채감이 풍랑처럼 요동치고 있다. 대지진이 흔들어놓은 것은 땅과 건물만이 아니었다. 식민지배 가해국 국민, 그러나 먹고살기 팍팍한 건 마찬가지인 평범한 서민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집단으로 살인에 가담해가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 괴로웠다. 사건 이후 이어질 작은 마을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에스에프(SF)소설을 쓰는 황모과 작가가 간토대지진 학살 100주기에 맞춰 펴낸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서 1923년 도쿄로 타임슬립 하게 된 청년은 눈앞의 비극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 애쓴다. 그러나 몇 번을 돌아가도 예정된 참사를 막을 순 없다. 다만 “잊힌 역사 속에서도 약자인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 움직인”(257쪽) 개인들의 끈질긴 생의 의지와 저항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억압과 학살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도 줄곧 영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전쟁 중에 소셜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퍼져나간 팔레스타인에 대한 허위 정보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지르더라는 100년 전의 불쏘시개와 겹쳐지기 때문이다.

해방의 꿈을 위한 연대

후쿠다무라 사건 피해자들은 조선의 백정과 유사하게 일본 내에서 차별받던 ‘부락민’이었다. 1922년 시작된 부락민 해방운동 수평사에 영향받은 영화 속 행상인들은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염원을 품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를 마주한 이들이 “전국에 산재하는 우리 특수부락민이여 단결하라”로 시작하는 수평사 선언을 암송하는 순간,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향한 꿈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지 느껴졌다. 영국과 미국 등 강대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100년 넘게 지속된 이스라엘의 ‘정착민 식민주의’에 저항하며 힘겹게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들이 해방의 꿈을 잃지 않도록 피식민 역사를 지닌 우리가 어떻게 연대할지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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