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가을의 단상
청명한 가을이다. 이 가을에 밀도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시간마름병’ 환자가 된 것처럼 분주한 나날들을 보낸다. ‘삶은 밀도다’라고 생각하지만, 입만 열면 “바쁘다, 바빠!”를 외치면서 바쁨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이게 제대로 사는 것인가?
그래서일까. 시간마름병이란 말이 참 절묘하다. 사회학자 김영선이 처음 사용한 이 말은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이 된 감자마름병에 빗대 시간에 쫓기며 사는 한국인들의 시간결핍 증상을 비유한 말이다. 시간결핍 증상을 앓는 삶이 밀도 있는 삶인가. 아닐 것이다. 밀도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의 인질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불황 탓인지 일만 하며 사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직장에서 퇴근해도 우리는 일에서 쉽사리 놓여나지 못한다. 콜포비아는 옛말이 되었고, 톡포비아(talk phobia)가 우리 일상 곳곳에 침투하여 좀처럼 온전한 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일과 쉼이 함께하는 조화로운 라이프스타일은 꿈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점점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지고 있고, 무책임해지고 있다.
시간마름병 환자의 삶은 좋은 삶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에는 햄릿이 유령과 헤어지면서 “미친 시대(Out of joint)”라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삶의 의미란 멈추고, 머무르고, 딴 데를 볼 때 생긴다. 어떻게 일과 쉼이 공존하는 삶을 살까.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시간의 민주화는 노동시간 단축 같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일이겠지만, 나를 위한 시간은 나날의 일상에서 마음먹으면 당장 실천할 수 있다.
나를 위한 시간을 살자. 나의 경우 최근에 최지애의 소설집 <달콤한 픽션>(걷는사람)을 읽으며 충만한 시간을 가졌다. 작품에는 ‘길고 긴 존버의 시절’을 사는 우리 시대 청(소)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패밀리마트’는 유독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근래 읽은 소설 가운데 문제의식이 가장 예리하지만, 문체는 한없이 다정하다. ‘다 필요 없고 성공하고 싶다, 그건 모르겠고 부자 되고 싶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영케어러인 주인공은 편의점에서 알바하며 ‘영끌’해서 모은 돈을 코인에 투자한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서울 외곽에 아파트를 공매로 낙찰받지만 남루하기 짝이 없는 집이다. 온전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쉼의 시간 따위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의 노동을 위해 쉼은 없고, 오직 일하고 잠만 자는 사회는 중독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나를 위한 시간을 되찾자. 나를 위한 시간이 허락되는 삶을 살아갈 때, 밀도 있는 삶이 되고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패밀리마트’ 속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래, 사람들한테 친절해라. 이름이 패밀리마트일 땐 다들 기대하는 바가 있을 거다”라는 대사에서 큰 위로를 받는 가을날이다. 가을이 절정을 향해 깊어가고 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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