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폐허 관광

기자 2023. 10.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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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종말이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저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으며,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 뿐이다. 모든 경위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에 읽은 책에서는, 시간이 돌연 끊어졌다가 다시 출현한 뒤 단절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본래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1) 단절 이전의 시간을 나는 ‘과거’라고 부른다.

지구의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거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빙하가 사라졌다. 태풍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긴 홍수와 긴 가뭄에 번갈아 시달리는 나라들도 있었다. 전기와 물의 가격이 오르다가 끝내 배급이 시작되었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통조림 같은 것들이 진열대를 채웠다. 전쟁과 폭동이 일어났고 뉴스에서는 연일 전 세계를 떠도는 난민의 행렬을 보도했다.

10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때아닌 태풍이 몰아쳤다. 뒤이어 오래 폭우가 쏟아졌다. 뉴스를 확인할 수 있었던 몇 시간 동안 쓰나미가 한반도 서쪽을 덮쳐 내가 사는 도시의 절반이 바닷물에 잠겼음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끊겼다. 전기도, 물도, 뉴스도. 건너편 아파트 3층까지 물이 차올랐다. 물의 지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금세라도 내가 서 있는 5층을 삼켜버릴 듯 지옥이 넘실거렸다.

비가 그치고 소금물이 빠져나간 뒤, 나무들이 붉게 변하며 시들었다. 짐승과 벌레도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은 잿빛 콘크리트와 녹슨 쇳조각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폭력과 약탈을 피해 한데 모였다. 온갖 소문이 돌았다. 고농도의 핵 폐기수에 잠겨 건물과 땅이 오염되었다든가 개발 중이던 생화학무기가 오작동으로 살포되었다는 추측이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많은 이들이 질병에 시달렸다. 피부병과 원인 모를 통증이 주된 증상이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찾아, 의료 기관을 찾아, 통제해 줄 조직을 찾아 국가의 중심부로 행진했다. 목적지에는 뜻밖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이들이 철과 강화 유리로 지은 안전 건물 속에 살고 있었다. 공기가 정화되는 온실과 목장도 갖추었다고 했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던 군대가 방호복을 입은 채 건물을 에워싸고 우리를 제지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오염되었고,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살기 위해 우리는 건물 밖으로 버려지는 쓰레기를 뒤졌다. 진공상태로 내보내는 그들의 배설물을 썩혀 밭을 일궜다. 땅은 오염되었으나 배설물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곡식과 채소는 잘 자랐다. 수확물을 먹은 반은 살아남았고 반은 죽어갔다. 우리는 사망률 50%에 만족했고, 인간의 배설물에 대한 생리적 혐오감을 잊었다. 쓰레기를 먹고 사용하는 자, 물건의 장의사이자 세계를 분해하는 자로 살아갔다.2) 종말의 시간이 요구하는 생존 방식이었다.

가끔 폐허를 안내하는 일을 한다. 바깥세상을 구경하려고 안전 건물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이들이 있다. 물론 방호복을 입고 잠시 머물다가 건물로 돌아간다. 허용되지 않는 일이지만, 권력의 가장 큰 매력은 금지된 일이 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맛보기 힘든 음식을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관광객을 이끌고 폐허가 된 빌라촌으로 들어섰다. 종말이 시작된 날, 울부짖으며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5층에서 내려다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빌라를 벗어나 고층 아파트로 이사해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했다. 맨 아래가 비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몰랐다. 이런 곳을 왜 빌라라고 부르지? 뒤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아 있는 나무들도 있네. 역시 자연은 정말 위대한 거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갈라진 벽 틈에서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기는 풀이 자라네! 그래? 풀빌라네. 흩어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들 인생의 가장 큰 역경은 권태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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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분해의 철학>, 후지하라 다쓰시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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