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의 우회도로] ‘블루 자이언트’의 청년과 세 어른

백승찬 기자 2023. 10.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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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자이언트>의 한 장면. 판씨네마 제공

개봉 중인 일본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는 ‘재즈 영화’다. 재즈를 소재로 했던 실사영화 <위플래쉬>나 <라라랜드>보다도 훨씬 재즈에 충실하다. 상영시간 120분 중 4분의 1 정도가 극중 밴드 재스(JASS)의 라이브 연주 장면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연주는 인간 배우 이상으로 박력 넘친다. 보컬리스트의 가사 없이 색소폰, 피아노, 드럼 연주만으로 강렬한 감정을 드러낸다.

재즈 영화지만 재즈 음악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블루 자이언트>의 주인공은 갓 고교를 졸업한 후 색소폰을 들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 다이, 작곡하고 피아노 치는 유키노리, 다이의 고교 시절 친구로 재즈의 매력에 빠져 뒤늦게 드럼을 배우는 슌지, 세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특정 분야에 빠져 모든 것을 바치는 청춘의 성장기는 일본 만화의 특기 중 하나다.

세 친구는 재즈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 ‘세계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가 되겠다며 밤마다 강변에서 곱은 손을 불어가며 색소폰을 분다. 덕분에 실력도 나날이 쌓인다. 다만 세상엔 아직 이들의 자리가 없다. 낡은 재즈 클럽을 무작정 찾아가 공연을 하게 해달라고 조르고, 스스로 전단을 만들어 공연 소식을 알린다. 그렇게 선 첫 무대에 관객은 단 세 명. 해당 재즈 클럽의 단골일 뿐,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은 아니다. 청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연주한다. 이 무대는 전설의 시작이 된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다. 청년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 과정에서 여러 어른을 만난다. 지역 소규모 재즈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에 서는 밴드 액트의 피아니스트는 얼핏 좋은 사람처럼 보인다. 완전한 무명인 10대 청년들에게 자신들 바로 직전에 연주할 수 있게 자리를 내준다. 다만 이건 인정이 아니라 시혜다. 피아니스트는 재스의 연주를 들어본 적조차 없다. 겉으로는 어깨를 두드려주며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재스를 얕잡아본다. ‘청년의 열정’으로 적당히 거칠고 시끄럽지만 흥겨운 연주를 해주면, 자신들이 뒤를 이어 능숙하게 마무리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다. 재스는 피아니스트의 오만에 화를 내지 않지만,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오직 무대에서 최선으로 연주해 인정받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다이가 도쿄에 와 재즈를 듣고 싶어 무작정 찾아간 클럽 테이크 투의 주인은 좋은 사람이다. 주인은 다이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에게 친절을 베푼다. 재즈를 들을 또 다른 클럽을 안내해주고, 재스 멤버들에게 언제라도 테이크 투에 와서 연습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재스의 성장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그다. 다만 주인은 재스가 자신의 클럽에서 공연할 기회는 주지 않는다. 훗날 주인은 그 이유를 말한다. “아무 일도 안 생길까봐 두려웠다.” 주인은 청년들을 뒤에서 후원하되, 온전한 믿음을 주진 않았다.

일본 최고의 재즈 클럽 ‘쏘 블루’는 청년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유키노리는 10대가 가기 전 쏘 블루에 서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쏘 블루의 매니저와 접촉하기 위해 연줄을 동원하고 마침내 매니저가 재스의 무대를 보게 하는 데 성공한다. 무대 이후 유키노리는 부푼 마음으로 매니저를 만나러 간다. 매니저는 색소포니스트, 드러머는 호평하지만, 정작 피아니스트 유키노리의 연주와 태도는 혹독하게 평가한다. “최악이다. 손가락 테크닉만 남발하는 거슬리는 피아노다.” ‘쏘 블루에 서기엔 때가 이르다’ ‘조금 더 정진하라’ 등 좋은 말로 타이를 수도 있었겠지만, 매니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라도 처음 만난 면전에서는 하기 힘든 날카로운 비판을 한다. 유키노리는 실망하지만 한편에서는 “그런 말까지 해주다니. 역시 이 클럽은 대단해”라고 감탄한다. 그럭저럭 좋은 연주인 줄 알았던 자신의 음악이 냉정한 프로페셔널의 세계에선 어떻게 들리는지 이보다 정확히 알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블루 자이언트>에 마냥 좋은 어른은 없다. 청년에게 순순히 자기 자리를 내어주거나, 조건 없이 물심양면 돕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는 청년을 얕잡아보고, 누군가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누군가는 정면에서 독설을 퍼붓는다. 청년들은 이들에게 도움받거나 방해받고, 그러면서 조금씩 싸워 세상에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나간다. 그 과정은 아름답다.

백승찬 문화부장

백승찬 문화부장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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