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의 여정, 직접 가봤습니다[권영철의 Why뉴스]
아쉽게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현장은 닫혀 있었다
10월에 폭설이 내려, 100년 전 얼마나 춥고 배가 고팠을까?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터 옥수수밭으로 변해 흔적도 없어
범도의 방현석 작가, "홍범도는 명예도, 돈도, 가족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 채널 : 표준FM 98.1 (17:30~18:00)
■ 진행 : 정다운 앵커
■ 출연 : 권영철 대기자
◇정다운> 10월 25일 오늘은 80년 전 홍범도 장군이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권영철 대기자가 홍범도 장군의 주 활동무대였던 봉오동 지역과 북한의 삼수갑산지역이 보이는 곳으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 봉오동 전투가 있었던 그 현장을 직접 다녀오신 거죠?
◆권영철> 그렇습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4km가 10리니까 16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봉오동은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입니다.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영화로도 다뤘고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습니다. 봉오저수지가 있는 곳은 하촌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10km 정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정다운> 저수지 안쪽으로는 못 들어가나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입구에서부터 차단하고 있습니다. 차단하는 이유는 봉오저수지가 수원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사 중이라고 하고, 또 사유지라는 설명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수지 입구쪽에 기념비가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1989년 도문시인민정부에서 세운 겁니다. 이전에는 기념비 방문은 허용이 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수자원 보호를 이유로 저수지 안에 있는 기념비 방문조차 불허하고 있습니다. 도문시의 수원지 입니다. 당연히 전투 현장은 접근이 불가능한 상탭니다. 저수지 아래에 모여 사는 조선족 마을 주민들도 기념비 방문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정다운> 봉오동 전투가 하루 만에 이뤄진 건 아니죠?
◆권영철> 그렇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나흘간 일어난 전투를
말합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해 격파했습니다.
이 습격이 봉오동 전투의 시작이 된 겁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합니다. 독립군이 남양수비대 60명을 사살하는데 그 장소가 삼둔자입니다.
삼둔자는 일광산 아래쪽 계곡을 말합니다. 중국 도문시 관내 월청향 간평이라는 마을 주변을 말한다고 합니다. 독립군이 일제의 남양수비대와 종성수비대의 경계망을 뜷고 국내로 넘나들던 중요 거점이었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대하소설 '범도'를 쓴 방현석 작가의 설명 들어보시죠.
"삼둔자가 본래, 봉오동 전투 시발점이 여기 최진동 홍범도 장군 부대 1개 소대가 건너가서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고 퇴각하고 난 뒤에 일본군이 추격해들어오면서 교전을 한 번 하죠. 그다음에 그들이 보복하기 위해서 남양에 있던 일본군으로 추격대를 만들어 쫓아와서 그때 일광산을 배후로 삼고 강을 두고 교전한 다음에 일본군이 넘어와서 그 다음에 퇴각하는 척 하면서 간 것이 삼둔자…."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은 1개 대대 규모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해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로 진입해 독립군에 대한 공격에 나섭니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가 벌어져 독립군이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대대를 격파하는 봉오동 대첩을 거두게 되는 겁니다. 독립전쟁의 서막을 올린 것으로 평가합니다.
◇정다운> 이후에 독립군이 청산리로 이동하잖아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를 했으니 일제가 설욕에 나섭니다. 이른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군과 심지어 마적까지 동원해서 독립군 섬멸 작전에 들어갑니다.
◇정다운> 청산리 지역도 가보셨나요?
◆권영철> 이번 답사에서는 청산리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왜냐 봉오동 지역 뿐아니라
청산리 지역도 막혀 있습니다.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백두산 천지에도 오르기로 했는데 아쉽게도 폭설로 출입이 통제돼서 오르지 못했습니다.
◇정다운> 아직 10월인데 눈이 왔다고요?
◆권영철> 폭설이 내렸습니다.
백두산 기슭에서 장백조선족자치현으로 이동했는데 이미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압록강 상류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하는데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길림성 백산시에 있는 장백현은 북한 혜산시와 마주보는 곳으로 압록강 상류에 있는 조선족 자치현입니다.
이날 숙박을 림강, 중국에서는 린장이라고 하는데 린강 건너편이 중강진읍입니다.
◇정다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중강진 말인가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중강진은 압록강의 중간지점이어서 중강진으로 불린다고 하고요. 깅릉에 정동진이 있듯이 한반도의 정북진이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 중강진의 설경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정다운> 그런데 어떻게 답사여행을 하게 됐나요?
◆권영철> 8월에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가 제기됐을 때 지인들끼리 식사를 하다가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던 홍범도 루트를 가보는 건 어떨까 라는 제안을 했고, 북중 국경지역을 잘아는 분이 중심을 잡고 답사 일정과 장소 등을 물색했습니다. 그리고 SNS를 통해 같이갈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처음에는 15명 이상이면 가자고 했는데 중간에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대하소설 '범도'를 쓴 방현석 작가가 합류하면서 참가자가 갑자기 불어나 마흔명을 넘기게 됐습니다. 이게 한 달 여만에 이뤄진 일입니다.
◇정다운> 그렇군요. 일단 봉오동 전투 현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쭉 들었습니다만, 자세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요. 홍범도 장군의 여정을 순서대로 한 번 짚어주세요.
홍범도 장군이 의병으로 활동을 시작한 지점이 금강산에서 가까운 ①안변지역입니다. ②덕원, ③북청, ④삼수, ⑤갑산, ⑥장진, ⑦홍원, ⑧장진, ⑨정평, 다시 ⑩삼수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통화를 거쳐 ⑪길림으로, 다시 러시아에서 ⑫블라디보스톡, ⑬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했습니다. 철도공사와 탄광 등지에서 일하면서 군자금을 모았고, 안중근 의사와 만나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1919년 대한국민의회 부대인 대한독립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한 뒤 8월 국내진입작전에서 대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백두산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일본이 독립군 토벌을 위해 '훈춘사건'을 일으킵니다.
◇정다운> 훈춘사건이 뭔가요?
◆권영철> 1920년 10월 2일에 일어난 일인데요, 일본군이 마적을 매수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해 일본인 9명을 살해합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영사관 보호와 마적 토벌이라는 구실아래 나남에 본부를 두고 있는 제19사단 병력을 불법으로 간도지역으로 출동시켜 독립운동가 뿐만아니라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합니다. 이 사건으로 훈춘에서만 조선인 240명이 학살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봉오동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학살하기 위해 19사단 병력 전부와 제20사단, 연해주 주둔군 제11사단, 제 13사단, 제14사단 일부 등 2만 5천명의 대부대를 편성해 독립군 부대 추격에 나섰습니다.
독립군도 민간인의 피해를 막기위해 백두산 기슭으로 이동했고, 일본군이 추격해오면서 청산리에서 격돌이 빚어진 겁니다.
청산리전투는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이어졌는데, 백운평전투, 완루구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쉬구전투, 만기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골짜기전투 등 열차례 전투를 말하는데 독립군은 10전 10승을 거두었습니다.
눈내리는 모습을 보셨겠지만 청산리전투가 벌어진 시일과 비슷합니다. 이 지역은 10월 하순이면 겨울로 접어든 대단히 추운 날씨입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니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독립군 중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나 군관학교 출신이 많았습니다만, 대다수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정다운> 그 근처면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지역 아닌가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출발합니다. 우당 이회영 6형제가 가산을 처분하고 압록강을 건너 망명길에 오른게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4개월 뒤입니다. 1911년에는 안동 일대의 유림과 지사인 이상룡 선생(안동 임청각) 등이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정리한 뒤 망명길에 오릅니다.
1911년 5월 서간도 류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지금은 길림성 통화시 류하현) 허름한 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강습소지만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 였습니다.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습니다.
이번 답사 때 이곳을 찾았는데요. 그냥 옥수수밭 뿐이었고요. 아무것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다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권영철>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그런 준비는 안했나 봅니다. 정부 차원의 아무런 조치도 없었고요.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방현석 작가가 10년 전에도 여기를 찾았는데 비슷했다고 합니다. 들어보시죠.
"그 흔적들은 지금 아무것도 안 남아 있고. 이 건물도 오래됐어요. 제가 답사할 때 왔던 게 10년 전인데…. 그 후에 아무도 관리를 안했으니까. 그런 노력들을 체계적으로 책임 있게 할 만한 다리들이 없었다고 봐야겠죠.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 항일 무장 투쟁 운동사에 대한 무관심이 있었고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근거지이고 출발점이고 지금 육군사관학교의 모태가 신흥무관학교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 군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찾으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보존하려고도 안했던 거죠."
신흥강습소 터가 있던 곳으로 가는 길이 진창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당시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이렇게 진창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흥강습소는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그렇게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가 마련된 겁니다.
1919년에는 3·1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나자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으며,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그렇지만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이 복수를 위해 양민응 학살하고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벌이면서 더이상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교성대)가 청산리 전쟁에 참전합니다.
◇정다운> 통화시에서 조선족들을 만나셨다고요?
◆권영철> 통화시에서 점심을 했는데 조선족 어르신들이 올해 여든이 되신 할머니를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우리말 노래소리가 들려서 물어보니 팔순잔치라고 했습니다. 함께 여행을 간 한 분이 축하주 1명을 선물하니 노래를 부르라고 하시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는 모습에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정다운> 이번 답사에서 윤동주 시인의 무덤에도 다녀오셨다고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답사 첫날 갔는데 해질녘에 도착해서 어둑어둑 합니다만 헌화도 하고
술 한 잔을 따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 주위에 비석이 3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한자어로 지금 보여드린 건 한글입니다. 그런데 뒷면 비문에는 윤동주 시인이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이라고 표시돼 있습니다.
그나마 무덤이 남아 있는 이유는 여기 명동촌 일대가 기독교인들의 무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덤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다운> 4박 5일이면 일정이 빠듯하지 않았나요?
◆권영철> 첫날 도착한 뒤에 연길에서 도문 도문에서 봉오동을 둘러본 뒤 백두산 기슭까지 300km 넘게 버스로 이동했습니다. 다음날은 압록강을 따라 385km 넘게 달렸고, 3일차는 500km 넘게 이동했습니다. 4일차는 압록강을 배로 이동했고, 버스로는 150km 넘게 달렸습니다.
마지막 날도 단동에서 심양까지 이동했으니까 4박5일간 버스로 1600km를 이동하면서 힘이 들긴 했지만, 홍범도 장군과 항일독립운동가들은 걸어서 그것도 총과 식량을 가지고 이동했다는 걸 생각해보니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고맙고 미안하고 마음이 참 복잡했습니다.
◇정다운> 마침 오늘이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지 80주기 되는 날인데요 답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였습니까?
◆권영철> 홍범도 장군은 포수 출신입니다. 그것도 범을 잡는 범포수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일념 외에 그 분이 탐한 게 없습니다. 권력도 명예도 돈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잃었고, 장남은 일본군과 전투중 전사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이동하다 병이 걸려 약 한 첩 써보지도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방현석 작가의 말 들어보시죠.
"홍범도 장군은 모든 것을 헌신했지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그 무엇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핏줄 한 점, 재산 한 푼 남가지 않고 떠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나라가 더 행복하고 더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온 생애를 나라와 동포들을 위해 바쳤던 홍범도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 합니다."
방 작가는 비록 소설의 형식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세로 글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방 작가는 이어 "만주 일대에서 적어도 100개 이상의 항일무장투쟁 조직이 활동했고, 최소 2만여명 이상이 무장투쟁에 참가했지만 우리 교과서에는 21명의 이름만 나온다"면서, "소설에서라도 최대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부르려고 노력했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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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권영철 대기자 bamboo4@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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