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이기고도 진 라운드도 있답니다'

방민준 2023. 10. 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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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칼럼 내용과 관련 없습니다. 사진제공=ⓒAFPBBNews = News1

 



 



[골프한국] A는 학창시절은 물론 사회에 나와서까지 항상 B를 뒤쫓는 모양새였다. 한 동네에 살면서 중고등학교 6년간을 함께 다닌 둘은 절친한 친구이면서도 쫓고 쫓기는 묘한 긴장의 관계였다. B는 공부도 잘 한데다 만능 스포츠맨이어서 언제나 무리의 리더가 되어 능력을 발휘했다.



 



반면 내성적 성격의 A는 공부는 열심히 했으나 한번도 B를 앞선 적이 없었다. 특히 운동에는 소질이 없어 체육시간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종횡무진 활약하는 B를 부럽게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A는 능력 있고 사교성도 좋은 B를 좋아하면서도 항상 앞서 있는 친구를 뒤쫓는 자신의 모습에 때로 초라함을 느꼈다.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해 둘 사이의 경쟁 관계는 수그러드는 듯했다. 둘 다 대기업에 취직했으나 분야가 달라 서로 맞닥뜨릴 기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A는 B를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승진 가도를 달리는 B를 일종의 질투와 패배감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B를 고교 졸업 후 거의 30여 년 만에 골프장에서 조우했다. 동문회에서 주최한 골프대회에 참가했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조로 편성된 것이었다. 골프장에 도착해 조 편성표를 보는 순간 A의 심정은 묘했다. 죽마고우와 함께 라운드한다는 반가움과 기쁨은 잠시, '골프장에서까지 이 친구의 승리를 지켜보아야 하는가'라는 혼잣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첫 홀 티샷을 기다리는 동안 B는 변함없이 활달한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라운드를 맘껏 즐기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B와 어울려 함께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A는 '30년 전의 학창시절이 재연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A는 이런 심리상태가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무던히 애를 썼다. 



 



티샷 순서가 정해져 모두들 티샷을 했다. B의 티샷은 동반자들로부터 '굿샷'이란 외침을 들었지만 그다지 좋은 샷은 아니었다. 최대한 긴장을 풀고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A의 티샷은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날아갔다.



 



서로들 보기 플레이를 한다고 엄살을 떨었지만 A가 보기엔 자신을 포함해 3명은 싱글에 가깝고 B는 좀 느슨한 보기 플레이로 보였다. B의 스윙은 교과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집중도도 떨어지는 듯했다. 첫눈에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홀이 지나고 나자 A는 야릇한 흥분에 싸이기 시작했다. '오늘 이 친구를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A의 골프는 쉬 무너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초보 시절에는 경계의 대상이 못되었지만 구력 3년이 지나면서 늦깎이 골프 신동으로 떠올랐다. '아무리 운동에 소질이 없다지만 골프만은 제대로 해보자'는 그의 각오와 각고의 노력이 낳은 결과였다.



 



서너 홀이 지나면서 예견된 것이기는 했지만 그날의 승부는 싱겁게 판가름 났다. A는 긴장 속에서도 평소의 실력을 발휘해 자신도 놀랄 70대 중반의 싱글 스코어를 기록했고 B는 전형적인 보기 플레이어의 느슨한 게임으로 80대 후반에 겨우 턱걸이했다. 동반자들과 악수를 나눈 뒤 마지막 홀을 벗어나는 순간이 이렇게 개운한 적이 없었던 듯했다. A는 입가에 번지는 통쾌한 승리의 미소를 참느라 무진 애를 썼다.



 



다음날 B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 주말에 같이 라운드할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좋다고 하자 B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진작 널 만나야 했었는데. 난 골프를 잘 못 치지만 볼 줄은 알거든. 네 골프 실력 대단하더라. 앞으로 자주 만나 지도해주면 좋겠어"하고 말했다.



 



휴대전화의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A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코 내가 친구를 이긴 것이 아니구나. 친구는 골프를 즐겼는데 나는 친구와 싸움을 한 꼴이 아니냐'



A는 다시 한번 B에 대한 패배감을 맛보아야 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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