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대홍수 1년, 150만 명은 '기후 불안'과 사투… 지구 '바이털 사인' 역대 최악
과학자들의 일관된 기후변화 경고에도
"지구 바이털 사인 35개 중 20개 '최악'"
지난해 6~10월 국토 3분의 1을 물에 잠기게 했던 파키스탄 대홍수는 '기후 재앙'의 대명사가 됐다. 1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상흔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삶이 뿌리 뽑힌 150만 명이 여전히 '기후 불안(climate anxiety)'과 사투 중이다.
기후 위기는 지구의 생명마저 위협하고 있다. 기후과학자들은 지구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인 '활력 징후(바이털 사인·vital sign)'가 역대 최악 상태라고 경고한다. 지구가 인간이라면 이미 응급실에 갔어야 한다는 진단이다.
'기후 불안' 내몰린 '기후 대학살' 생존자들
24일(현지시간) 아랍권 언론 알자지라에 따르면, 1,700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3,300만여 명에게 직접적 피해를 준 대홍수가 파키스탄을 휩쓴 지 1년여가 흐른 지금도 최소 150만 명이 이재민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마(水魔)가 할퀴며 남긴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당시 물난리를 "기후 대학살"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파괴적 수준의 자연재해였기 때문이다.
생존한 파키스탄 주민들은 여전히 기후 불안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알자지라는 전했다. 파키스탄 남부 도시 바딘에 사는 아르준은 "홍수로 인해 집이 세 번이나 완전히 파괴됐다"며 "피해와 복구라는 끊임없는 악순환이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토로했다. 8명의 자녀를 둔 알리 벅스는 "내년에 또 홍수가 오면 재건을 위한 모든 노력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가 불러온 기후 불안이 삶의 의지를 꺾고, 무력감과 절망만 안겨 주고 있는 셈이다.
알자지라는 "파키스탄은 1959년 이후 전 세계가 쏟아낸 온실가스 중 겨우 0.4%를 배출했지만, 기후 재앙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나라"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특히 가장 취약한 계층을 중심으로 기후 불안이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간이 다 됐다"… 지구 '바이털 사인' 20개, 최악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지구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과학자 12명은 24일 '바이오 사이언스' 저널에 발표한 '2023 기후 보고서 현황'을 통해 "지구상의 생명체는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며 "지구의 '바이털 사인'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쁘다"고 진단했다. 지구의 생명체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뜻이다. 이번 보고서는 과학자 1만5,000명이 승인한 2019년 '기후 비상 경고'의 후속 연구 결과다.
연구를 주도한 미국 오리곤 주립대 연구팀은 체온, 호흡, 혈압 수치 등을 통해 사람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듯, 기후 위기 추적을 위해 지구의 35개 바이털 사인을 분석했다. 그 결과 온실가스 배출, 지구 온도 변화, 해수면 상승, 인간과 가축의 개체 수 등 20개 지표가 '기록적인 극한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지난 수십 년간 과학자들은 인간 활동에 따른 극단적 기후변화가 초래될 미래에 대해 일관된 경고를 해 왔다"며 "불행히도 시간이 다 됐다. 우리는 지구를 위험한 불안정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 주저자인 크리스토퍼 울프 오리곤 주립대 교수는 "2100년에는 30억~60억 명이 거주 가능한 지역 밖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심각한 더위와 식량 부족, 사망률 증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보고서는 "큰 문제에는 큰 해결책이 필요하다"면서, △화석연료 보조금의 단계적 폐지 △산림 보호 강화 등을 대책으로 주문했다.
이날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달성하기 위해선 지난 10년보다 탄소 배출량을 3배 더 빨리 줄여야 한다고 밝혔다. EU는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잡았지만, 최근 30년간 32%를 줄이는 데 그쳤다. 당초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감축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얘기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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